시리자(Syriza) 밀착 취재 – 그들이 선거에서 승리하기까지 (2)
2015년 2월 3일  |  By:   |  세계  |  No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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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프라스 당수는 유로존에서 당장 탈퇴하거나 일방적으로 채무 불이행을 선언하지는 않겠다는 점을 선거기간 동안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그럼에도 시리자가 기대고 있는 기본적인 원칙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합니다.

“시리자는 새로운 정치를 할 겁니다. 그리스가 이 지경이 되도록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한 부패한 낡은 정치와 단절하고 제 기능을 하는 정부, 시민들의 편에 서는 정치를 할 겁니다. 탈세를 비롯한 세금 회피에는 단호히 대응해나갈 겁니다.”

시리자는 우선 그리스 전역에 연대의 회관이라 이름 붙인 빈민들을 위한 무료 식료품 배급소(food bank)를 세웠습니다. 이곳은 단지 먹을 것을 나눠주는 곳이 아니라 생계난으로 벼랑 끝까지 몰리는 서민들에게 상담과 함께 난관을 헤쳐나가는 법을 고민하는 공간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유권자들의 생활 속에서 쌓은 신뢰에 기성 정당들은 입밖에 꺼내지도 못하는 긴축정책 반대라는 선명한 메시지가 더해지면서 시리자는 총선에서 승리합니다. 긴축정책 반대는 유럽 중앙은행이나 독일과 무조건 등을 돌리는 게 아니라 우선 가능한 세수를 충분히 확보하고 그리스 경제를 스스로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시리자는 선박 재벌, 건축 재벌 등 기존의 보수적 카르텔에 확실히 세금을 거두고 그간 공공의 전파를 사실상 공짜로 써온 민영방송국에도 사용료를 물리는 등 서민이 아니라 부자 증세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시리자의 돌풍이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고 말 거라는 견해도 분명 있었습니다. 특히 서구의 많은 언론들은 급진적인 사상으로 무장한 채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들의 노래인 “붉은 깃발 (Bandiera Rossa)”를 줄기차게 불러대는 정당을 실제 선거에서 국민들이 정말 뽑아줄지 의구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 유권자들은 오히려 상당히 현실적인 대안으로 시리자를 택했습니다. 시리자는 모든 협상을 깨고 유럽과 대치할 세력이 아니라 반대로 어떻게든 협상을 이어나가며 그리스가 감당할 수 있는 한에서 빚을 갚아나갈 대안이라고 여긴 겁니다.

4년 전에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의 오큐파이 시위대 속에서 “아무도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며 절규하던 두루(Rena Dourou) 씨는 선거가 끝난 뒤 “이제 모두가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며 “이는 단지 그리스만이 아니라 모든 유럽이, 특히 모든 유럽의 젊은 세대들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데 아주 중요한 싸움”이라고 평가했습니다. 4년 전 같이 최루탄을 피하며 했던 인터뷰에서 두루 씨가 했던 말을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제 2의 시라크든 슈뢰더든 키르츠네츠든 아주 인기 있는 정치인이 필요해요. 이들이 나서서 모두의 삶을 망치고 있는 긴축정책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를 끝장내야 한다고요.” 제가 되물었죠. “기성 정치인에게 기대할 게 아니라 당신 세대들이 직접 당신 세대의 목소리를 내면 되지 않겠냐”고요.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던 두루 씨는 이제 꿈 같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1974년 군사독재가 끝난 뒤 (무늬만) 중도 우파, 중도 좌파의 양당 체제는 급진 좌파 세력이 수권 정당의 지위를 위협하지 않는 한 이를 탄압하지 않았습니다. 군부독재 반대 시위에 누구보다 앞장섰지만, 2차대전 종전 이후 내전과 독재 정권 시기를 거치며 고문과 탄압을 겪었던 좌파 활동가들은 정치 일선에서 권력을 추구하는 대신 저항의 문화를 만드는 데 일조하거나 노조 결성에 주력하는 등 노동자들의 생활밀착형 정치세력으로 거듭났습니다. 1970년대 소련과 갈라선 유럽 공산주의의 영향 아래 이들은 한달 50만 원 남짓한 최저임금을 받으며 생활하는 노동자, 빈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시리자는 기존 중도좌파 정당이 좌파라는 타이틀을 달고도 사실상 방기하거나 할 생각이 없었던 노동자, 서민 중심의 기조를 과감하게 끌어왔습니다. 결국 PASOK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유럽연합과 IMF에 끌려다니다가 스스로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아소스(Assos) 시로 돌아가 실제 개표 결과를 살펴봅시다. 유권자 약 4,000 명 가운데 1,529명(38%)이 시리자를 뽑았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 곳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수주의 정당을 밀어줬는데, 이들의 득표율을 합치면 29%, 그리고 극우정당인 황금새벽당이 7%를 득표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작은 마을이 그리스 전체 표심의 축소판인 것처럼 주요 정당들의 득표율이 전국 투표 결과와 상당히 비슷하다는 겁니다. 전통적으로 보수 성향인 마케도니아 일대와 펠로폰네소스 남부를 제외하면 그리스 유권자들은 이번 선거를 통해 명백히 좌향 좌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소스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 시리자의 의원은 “기존 정치 체제로는 도무지 답이 없다는 걸 유권자들이 깨닫고 변화를 택했다. 하지만 그 변화가 꿈만 좇는 급진적인 전술로의 변화가 아니라 이성적이고 실현 가능한 변화”라고 평가했습니다.

시리자는 냉전과 권위주의 독재, 그리고 보수적인 양당제 하에서 굳어진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과 온갖 언론이 쳐놓은 레드 콤플렉스의 장애물을 뚫고 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이제 시리자와 시리자를 선택한 그리스 국민들은 새로운 그리스를 만들어가는 중대한 과제를 앞두고 있습니다. 구호와 현실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괴리가 나타날 것이고, 시리자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금방 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리자는 등장 만으로 그리스 뿐 아니라 온 유럽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 의미 있는 정치 운동입니다. (Guard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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