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라티노, 인구에 비해 정치적 영향력이 낮은 이유
미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주인 캘리포니아 주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인종은 이번 달을 기점으로 공식적으로 38.8%인 백인(non-Hispanic)을 제치고 라티노(39%)의 몫이 됩니다. 매번 선거를 거듭할수록 유권자 수에 있어서 폭발적인 증가를 기록하고 있는 라티노들은 퓨리서치 센터의 표현을 빌리면 미국의 선거 지형에서 “잠에서 깨어난 거인(An awakened giant)”입니다. 그런데 라티노들에게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슈라 할 수 있는 불법이민자 추방(deportation) 문제는 여전히 답보 상태입니다. 라티노들이 71%의 몰표로 당선시킨 오바마 대통령 임기 동안 본국으로 추방된 라티노들의 숫자는 2백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전임 부시 대통령 시절보다 훨씬 많은 숫자입니다. 이쯤 되면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모양새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이민법 개혁안은 계속해서 지지부진한 상태고, 추방은 좀처럼 멈추지 않자 라티노 단체들은 오바마 대통령을 향한 서운함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최근 이민국 관계자들을 불러놓고 ‘법이 허락하는 선에서’ 비인도적인 추방을 최대한 줄여줄 것을 요청했지만, 대통령령에 해당하는 행정조치(executive action)를 취해 추방을 멈추거나 획기적으로 줄여달라는 라티노들의 바람에 비하면 서운함을 누그러뜨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요식행위였습니다.
라티노의 인구가 급증하는데도 정치적 영향력이 이에 비례해 늘어나지 않는 데에는 몇 가지 구조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우선 미국에 사는 라티노들 가운데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의 비율을 따져보면 다른 인종들보다 현격히 낮습니다. 지난 대선이 치러졌던 2012년을 예로 들어볼까요? 인구로 따지면 당시 라티노 인구는 5천 3백만 명, 미국 전체 인구의 17.2%였습니다. 하지만 전체 유권자 가운데 라티노 유권자들은 10.8%에 그쳤고, 실제 투표를 한 유권자들 가운데 라티노 유권자들은 8.4%밖에 안 됐습니다. 인구 대비 정치적 목소리를 충분히 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고, 정치인들은 당연히 표를 갖고 있는 유권자들만 바라보지 표가 없는 이들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여기에 라티노들이 많이 거주하는 캘리포니아나 텍사스 주는 이른바 경쟁주(Swing State)가 아닙니다. 주별로 치른 선거인단의 투표결과를 바탕으로 한 승자독식 선거를 치르는 미국에서 정치인들은 경쟁이 치열한 주에 힘을 쏟는 반면 ‘어차피 결과가 뻔한 주’들에는 상대적으로 힘을 아낍니다. 캘리포니아(민주당이 우세한 Blue State)나 텍사스(공화당이 우세한 Red State)는 라티노들에게는 아쉽게도 경쟁주가 아닙니다.
그래도 2004년 대선에서 부시에게 민주당이 우세했던 뉴멕시코 주에서의 승리를 안겨준 것도, 2008년 오바마에게 8개 주 총 선거인단 80표를 안겨준 것도 라티노들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라티노들의 영향력은 점점 무시 못할 만큼 커졌고, 오바마의 재선에 혁혁한 공을 세운 라티노 유권자들은 이번에는 드디어 숙원사업인 이민법 개정을 이뤄낼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선거 때부터 이민법 개정을 주요 현안으로 들고 나왔고, 당선과 함께 공화당을 압박하며 (민주당이 다수인) 상원에서 개정안 초안을 통과시켰습니다. 하지만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는 하원에서의 반대는 생각보다 완강했고, 이민법 개정안은 답보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유럽의 극우성향 정당에서나 나타나는 외국인 혐오증을 서슴지 않고 드러내는 티파티를 비롯한 공화당의 우경화가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다시 한 번 제 목소리를 못내고 있는 라티노 유권자들의 정치적 조직력의 부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살펴본 라티노 인구 5천 3백만 명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이 가운데 7백만 명이 서류상으로 신분을 증명할 수 없는 이른바 불법 이민자(undocumented immigrants)입니다. 5백만 명은 합법적인 이민자이지만 시민권자가 아니라 투표권이 없습니다. 그리고 1천 7백만 명은 아직 어려서 투표권이 없습니다. 남는 건 유권자 2천 4백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절반이 안 됩니다. 백인이나 흑인이 인구 대비 2/3 정도가 유권자인 걸 감안하면 쉽게 말해 표심을 무기로 집단의 요구사항을 정치인들에게 관철시키기에 라티노들의 인구 구성은 불리한 셈입니다. 특히 흑인 커뮤니티의 경우 교회를 비롯해 정치적인 동원이 가능한 조직이 오랜 세월 동안 잘 발달돼 있지만, 대다수 라티노들이 찾는 성당은 종교적인 역할 이외에 커뮤니티의 의견을 규합하고 하나로 묶어내는 정치적 동원력은 훨씬 약한 편입니다.
장기적으로 라티노들이 미국 정치 판세를 가늠할 주요 인종이 될 거라는 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문제는 급증하는 인구에 비해 당장의 정치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는 점인데, 이는 올 11월 치러지는 중간선거나 2016년 대선에서도 흥미로운 이슈가 될 전망입니다. 지금처럼 민주당이 이민법 개정에 있어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적어도 다음 대선에서 라티노 유권자들은 공화당도, 민주당도 지지하지 않고 선거날 투표소를 찾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Guard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