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정은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2/2)
2017년 1월 2일  |  By:   |  과학  |  No Comment

그렇다면, 상대에게 너무 많이 베푸는 것과 ‘약간의 솔직함’이 우정이 파괴되는 원인이라는 뜻일까요? 이 결론은 일반적인 우정에 대한 인식, 곧 서로에게 솔직할 것, 상대방에게 가능한한 친절하게 대할 것이라는 생각과 정확히 반대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왜 이 세상에 ‘사이가 나쁜 친구’,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친구’, 그리고 ‘한때 좋았지만 이제 사이가 나빠진 친구’가 그렇게나 많은지를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진화생물학자 로버트 트리버스는 1971년 논문 ‘호혜적 이타주의의 진화(The Evolution of Reciprocal Altruism)’에서 ‘모든 개인은 이타적인 면과 사기꾼적인(cheating) 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여기서 사기꾼이란 친구가 주려는 것보다 조금 더 적게 주려는, 또는 친구가 가져가려는 양보다 조금 더 많이 가져오려는 경향을 의미합니다.

트리버스는 노골적인 사기꾼과 ‘과도한’ 이타주의자들이 진화 과정에서 도태되는 동안 우리는 교묘한 사기꾼으로 진화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대놓고 사기를 치는 이들은 상대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되며, 맹목적 이타주의자 역시 자신의 희생을 보상받지 못한다. 자연선택은 노골적인 사기꾼을 쉽게 솎아낸다. 반면, 상대의 호의에 보답하지만 받은 것에 비해서는 조금 적게 돌려주는, 정확히 말하면 상대방이 같은 상황에서 자신에게 줄것이라 생각하는 정도보다 조금 적게 주는 교묘한 사기꾼은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란 이런 심리적 규제 시스템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이타적인 사람을 좋아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착한 사람은 더 많은 친구를 얻습니다. (물론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올라가는데에도 유리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기꾼이냐 이타주의자이냐, 혹은 착한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가 아니라 서로 다른 맥락과 관계에서 어느 정도 이타적이며 사기꾼인지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사기꾼과 이타주의자가 시소처럼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며, 이 때문에 우정과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 50%라는 숫자가 자주 나오는 것일지 모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친구 관계 중 두 사람이 모두 친구라고 생각하는 관계는 50%에 불과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사회적 관계 중 양가적 관계의 비율 역시 약 절반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상대의 거짓말을 약 50% 정도 눈치챕니다. 우리는 상대에게 완전히 속아넘어가지 않도록 상대의 거짓말을 어느 정도는 눈치챌 수 있게 진화했지만, 또한 실제 우정의 추한 진실을 완전히 파악해 실망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 까지만 진화했습니다. 우리는 친구의 사기를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진화했지만,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이의 사기를 눈치채지는 못합니다. 이 시소가 움직일때마다 우리의 우정도 영향을 받습니다.

사기와 이타주의를 적절히 조합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일로 들립니다. 트리버스 역시 동의합니다. 그는 친족이 아닌 이들을 대상으로 이타주의를 조절하는 문제가 홍적세 기간 동안 인간의 뇌를 크게 만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뇌과학자들이 그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곧, 인간을 영리하게 만든것은 바로 우정입니다.

“언제 우정은 상처로 바뀌는가(When Friendship Hurts, 2002)”를 쓴 심리학자 잰 야거는 친구에게 배신을 당해 본 이들의 비율이 응답자 중 68%에 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이들이 친구를 배신하는 것일까요? 그 비율이 이렇게 높다는 뜻은, 우리도 친구를 배신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이런 가슴아픈 생각은 내게 여러가지 질문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정말 작은 죄를 용서하기 위해 노력하나요? 아쉬움이 쌓여서 우정을 잃게 되기 전에 이를 미리 해결하려 노력하나요? 서로 잘 지내기위해 노력하나요? 그에게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참작해 주나요? 줄 수 있을때 다 주나요 아니면 얼마나 돌려받을 수 있을지 따져보나요? 우리는 내가 생각하고 믿는 것을 친구 역시 생각하고 믿을 것이라 공평하게 간주하나요? 우리는 정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나요? 아마 우리의 친구 대부분은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할겁니다. 그들이 좋은 친구가 아니라면, 또는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면, 또는 우리가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면, 그들을 나쁜 친구라고 이름 붙이고 죄책감을 느끼는 대신 그냥 이를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친구가 절교를 선언하거나, 혹은 아무 설명없이 사라지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오늘날 사회적 관계를 맺고 끊는 것이 보다 일상적인 일이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정은 영원한 것이라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우정이 깨어질때, 특히 그 친구가 아주 오랜 친구일 때 우리는 이런 우정의 상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 우리는 그 친구를 ‘나쁜 친구’로 분류하고 맙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자신을 위해 친구를 떠나기도 합니다. “대학에서의 우정(Connecting in College, 2016)”에서 사회학자 재니스 맥커비는 친구와의 우정을 끝내는 것은 젊은 이가 성장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과 인격을 긍정적인 면에서건, 부정적인 면에서건, 친구와 비교하며 만들어 나갑니다.

게다가 우리 자신이 더 나은 친구가 되려하며 충돌을 피하려 노력하더라도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여러 요인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 명이 같이 어울리는 그룹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누군가가 선을 넘었지만, 당신은 이 모임을 깨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며, 그래서 그를 더이상 친구로 생각하지 않겠다고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과의 직접적인 만남은 피하지만, 모임에 두 사람 중 한 명만 초대하게 만드는 식의 직접적인 충돌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때로 우리는 나쁜 친구와도 어울려야 합니다.

사실 누구와 함께 어울릴 것인지 그리고 누구와 더이상 어울리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힘은 우리 자신 역시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매우 좋아하지만 꽤 오랜 시간 연락하지 못한 사람이 있지 않나요? 그리고 종종 만나지만, 사실 그렇게 친하지 않은 친구들은 어떻고요? 전자에 속하는 이들 중에 지금 이 순간 당신을 나쁜 친구로 분류하고 있는 이가 있을지 모릅니다.

나쁜 친구와 엮이고, 그들에게 버림받거나 실망하는 일은 인생에서 큰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며 몸과 마음에 모두 해가 됩니다. 그러나 친구가 한 명도 없는 것은 훨씬 나쁜 일입니다. 같이 놀 친구를 찾지 못한 아이나 오랫동안 단짝을 바라는 십대, 자신의 실패나 성공을 나눌 사람이 없는 어른을 생각해 보세요. 외로움은 갈증이나 배고픔만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시카고 대학의 사회학 교수 존 카치오포는 외로움이 우울증, 비만, 알콜 중독, 심혈관 질환, 수면 장애, 고혈압, 치매, 세상에 대한 냉소적 관점, 자살에 대한 고려 등과 연관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즉, 당신이 친구 때문에 고민중이라면, 적어도 당신은 친구가 있다는 것이고, 매우 운이 좋은 축에 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부로

(AEON)

원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