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그레이엄 – 천재에 대한 버스표 이론(1/2)
2019년 12월 6일  |  By:   |  과학  |  No Comment

훌륭한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는 타고난 자질과 굳은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특정한 주제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관심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몇몇 사람들에게 조금 실례를 해야겠네요. 바로 버스표를 모으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옛날에 버스를 탈 때 요금으로 내던 버스표를 수집합니다. 다른 많은 수집가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자신이 수집하는 버스표의 차이에 대해 강박에 가까운 집착을 보입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버스표의 차이는 다른 이들은 거의 눈치채지 못하는 수준의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차이를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오래된 버스표에 대해 관심을 쏟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은 이런 종류의 집착이 가진 두 번째 특징을 말해줍니다. 바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버스표에 대한 사랑에는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를 감동시키거나 부자가 되기 위해 버스표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버스표가 좋아서 버스표를 수집합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도 이런 공통적인 특징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하게 생각되는 그런 일에 마치 버스표 수집가처럼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보였습니다. 다윈이 비글호 항해에 관해 쓴 책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그가 자연의 역사에 대해 엄청난 흥미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의 호기심은 거의 무한에 가까워 보입니다. 몇 시간 동안이나 석판에 수열을 써나간 라마누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후에 그들이 발견할 위대한 업적을 위해 “기초를 쌓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이는 나중에 끼워 맞춘 설명일 뿐입니다. 그들은 마치 버스표 수집가처럼 자신이 끼니를 거르고 밤을 새워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던 것입니다.

하지만 라마누잔과 버스표 수집가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수열은 중요한 것이지만, 버스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천재가 되기 위한 조건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중요한 어떤 주제에 대해 사심 없는 집착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정의에 처음 이야기했던 두 조건이 빠지지 않았느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 주제에 강박에 가까운 관심을 가지기 위해서는 타고난 자질과 굳은 의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만약 수학에 대한 충분한 자질이 없다면, 수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무언가에 강박적 관심이 있다면, 굳은 의지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호기심이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자신을 채찍질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강박적 관심은 행운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파스퇴르가 말한 것처럼 행운의 여신은 준비된 이를 사랑합니다. 강박적 관심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무욕은 이런 강박이 가진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무욕은 진정성의 밑바탕이 될 뿐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 기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종종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길은 대체로 다른 이들이 이미 밟아 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들은 어떻게 다른 이들이 간과한 그 길을 가 볼 수 있었을까요? 흔히 그들이 남들보다 더 뛰어난 재능이 있었고, 따라서 선견지명을 발휘했다는 설명이 뒤따릅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보면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다윈이 남들보다 생물 종에 관심을 더 가진 것은 그가 여기에 위대한 비밀이 숨어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그저 이 문제에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다윈은 그 관심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라마누잔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그 길이 위대한 발견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 나아간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없었을 뿐입니다. 덕분에 그들은 야망을 품은 이들이 무시했던 그 길을 묵묵히 밟아나간 것입니다.

위대한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한 이 중 어떤 제정신인 사람이 톨킨처럼 수년 동안 엘프가 쓸 언어에 집착할까요? 아니면 트롤럽처럼 영국 남서부의 모든 집을 하나하나 방문할까요? 설사 톨킨과 트롤럽도 소설을 쓰겠다는 목표만 있었다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버스표 이론은 칼라일이 내린 천재의 조건과 비슷합니다. 바로 고통에 대한 무한한 참을성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버스표 이론은 이 무한한 참을성의 근원이 칼라일이 의미한 것처럼 인내력이 아니라 수집가들이 가진 일종의 무한한 관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른 하나는 이 무한한 참을성을 중요한 일에 발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일이 중요한 일일까요? 문제는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답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관심을 가진 그 분야에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가 존재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기본적인 원칙은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이들이 창조한 무언가를 소비하기보다는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관심을 가진 분야가 남들에게는 어려운 문제일 때 가능성이 더 커질 겁니다. 재능을 가진 이들이 관심을 갖는 분야가 더 중요할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저 아무런 문제에나 관심을 가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것도 확실한 보장을 주지는 않습니다. 사실 여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위대한 결과물을 만들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낭비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삶의 수많은 영역에서 보상은 위험에 비례합니다. 이 규칙이 여기에도 적용된다면, 위대한 발견을 이룰 길은 곧 그 노력이 헛되게 될 길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그런 규칙이 존재하는지는 모릅니다. 물론 흥미로운 일에 엄청난 시간을 쏟아부었다면, 아무런 보상이 없기는 어렵겠지요. 하지만 이 보상과 위험의 관계는 또한 매우 강력한 규칙입니다. 예를 들어 뉴턴의 경우에도 이 규칙은 성립했습니다. 그가 가졌던 한 가지 강박적 집착은 유례없이 유용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바로 자연을 수학으로 묘사하겠다는 집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가지 관심사가 더 있었습니다. 바로 연금술과 신학입니다. 물론 그는 자신의 노력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이라 불리는 학문에 대한 그의 투자는 그가 다른 두 관심사에 기울인 노력을 보상하고도 남았습니다. 하지만 커다란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는 점에서, 그가 물리학의 보상을 받기 위해 연금술과 신학에 기울였던 노력은 과연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요? 잘 모르겠네요.

(폴 그레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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