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저널리즘의 역할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보도하는 것입니다
편집자주: NPR 보도국은 이번 주, 민주당 여성 의원들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을 “인종차별적(racist)”이라고 보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특정인물이나 행위에 “인종주의”라는 직접적인 딱지를 붙이지 않고 다양한 유사 표현을 사용해온 경향에서 벗어난 결정이었죠. 그러나 NPR 내부의 의견은 여전히 분분합니다. 보도국의 다양성과 기자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키스 우즈(Keith Woods)는 여전히 이런 식의 판단은 독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보도국은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지만, 칼럼을 통해 우즈의 소수 의견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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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합중국의 대통령이 다시금 트위터라는 스나이퍼 타워에서 이민과 인종문제, 그리고 상식적인 품위를 저격하고 나섰습니다. 다시금 언론인들은 직업인으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인종적으로 민감한”, “인종적으로 무지한”과 같은 표현으로 에두르지 말자, 인종주의를 있는 그대로 인종주의로, 차별주의자를 있는 그대로 차별주의자로 부르자고 말이죠.
저는 특정 대통령과 그의 선동적인 언행에 특정 딱지를 붙이고 싶어하는 언론인들의 도덕적인 분노를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에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저널리즘의 미덕은 냉철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에 있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저속한 오물 구덩이가 되어버린 오늘날의 정치에서 저널리즘을 분리시킬 수 있는 아주 가느다란 선이기 때문입니다.
도덕적인 라벨링은 애초에 저널리즘의 일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넘어버린 선이 어디에 있는지 누가 결정할 수 있습니까? 대통령이 “무지하다(insensitive)”고 느낀 오늘의 편집장입니까, 아니면 그가 “인종주의자”라고 생각한 내일의 편집장입니까? 제 개인적인 잣대를 적용하자면, 이 나라가 그 선을 넘은 것은 수십년 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론인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언론인이 할 일은 보도하고 인터뷰하고 인용하는 것입니다.
저는 저널리즘 순수주의자가 아닙니다. 40년 전, 이 일을 시작할 때 저에게는 성차별과 외국인 혐오, 백인우월주의 같은 전통을 보호하기 위해 “객관성”이라는 개념을 악용하는 악습을 무너뜨리겠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진실 보도, 책임성, 공정성 등이 저널리즘의 힘이지만, 동시에 “공정성”이라는 개념이 도리어 이 사회의 교묘한 편향을 숨기고 변호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역 신문을 배달하던 어린 시절부터 비판적인 소비자였습니다. 지역 신문이 뉴올리언즈의 흑인과 빈곤층에 대해 보도하는 왜곡된 행태에서 “객관성”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죠. 그 이후로 저널리즘에는 많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페이지에 와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난 주의 트윗이 인종주의적이었다면, 작년의 트윗은요? 일부는 여성혐오적이지 않았나요? 천박하고, 동성애혐오적이고, 성차별적이지 않았던가요? 이런 판단의 언어는 얼마든지 쓸 수 있지만, 이는 저의 의견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언어는 신문의 사설란에 국한되어야 합니다.
이는 언론인들이 그렇게나 소리 높여 주장하는 저널리즘의 역할이 걸린 문제입니다. 심도있고 공정한 보도를 통해 불의를 고발하고 힘있는 자들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바로 그 역할 말입니다. 대통령의 언행에, 대통령이라는 인간에게 인종주의자 딱지를 붙이는 것은 통쾌한 일일 것입니다. 그의 트윗이 종종 언론인들을 향하는 일도 있는 마당에요. 하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따를 것입니다.
이미 대중들의 시각에서 저널리즘을 케이블 채널의 편파적인 소음과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 시대입니다. 팩트와 의견을 가르는 선을 위험하게 넘나드는 언론인들도 너무 많죠. 그 선이 사라지고 언론인이 모두 이 지저분한 흙탕물 속에 잠기고 나면, 인종주의를 고발하고 격파해온, 역사적으로 흠이 많고 완벽하지 못한 저널리즘이라는 도구는 다른 모든 소음에 묻혀 버리게 될 것입니다.
민주당 여성 의원들의 출신 국가를 운운하며, 그 곳으로 돌아가라고 종용한 대통령의 트윗은 미국 건국 초기의 인종주의자와 외국인혐오자들의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문장이 도덕적인 판단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을 맥락이라고 부를 것이고,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뿐 의견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인종주의자 딱지를 붙이는 행위의 대안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널리즘은 보도하고,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고, 출처를 밝히고 맥락을 더하는 것입니다. 어떤 언행에 대한 도덕적인 라벨링은 그 언행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 논설위원, 칼럼니스트, 종교 지도자와 철학자, 그리고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둡시다. (NP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