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에서 잊혀진 이름, 복지권을 외치던 흑인 여성들
2019년 7월 8일  |  By:   |  세계, 정치  |  No Comment

1996년 “뉴 리퍼블릭(New Republic)”지는 복지 정책에 대한 당시 토론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낸 커버스토리를 실었습니다. 신원불명의 흑인 여성 사진이 “심판의 날(Day of Reckoning)”이라는 제목을 달고 표지에 실렸죠. 한 손에는 담배를, 다른 한 손으로는 젖병을 든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당시에 논의 중이었던 복지개혁안은 뉴딜 시대가 탄생시킨 복지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내용이었습니다. 복지 수당을 누가, 얼마나 오랜 기간동안 받을 수 있는지를 전면적으로 재정의하는 내용이었죠. 법안 통과를 찬성하는 이들은 새로운 법이 수백만 수혜자들을 일터로 되돌려보낼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대선 운동 당시 “우리가 알던 기존의 복지는 끝”이라는 공약을 내걸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공약 이행에 착수한 것은 1994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대승을 거두고 대통령을 압박하기 시작한 이후였죠. 결국 클린턴 대통령은 “뉴 리퍼블릭”의 커버스토리가 나온 후, 법안에 서명을 하기에 이릅니다. 해당 법안은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백악관 수석 경제 자문 가운데 한 사람은 법안 통과에 대한 항의 표시로 사임하기도 했습니다.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서명식에서 클린턴의 옆자리를 장식한 사람은 릴리 하든이었습니다. 아칸소 출신의 흑인 싱글맘으로, 복지 수당을 받고 살다가 일터로 돌아간 인물로 소개되었죠. 그녀는 아칸소 주지사 시절 클린턴이 복지를 축소하는 정책을 펼친 덕분에 자립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활짝 웃고 있는 백인 권력자들에 둘러싸인 채, 자신과 같은 수백만 명의 복지 수혜자들이 자립할 기회를 얻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소위 말하는 “그림”이 나오는 장면이었습니다.

릴리 하든의 자세한 인생 스토리는 훨씬 복잡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빈곤 속의 삶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말이죠. 하지만 그녀의 삶은 잡지 표지에 등장한 여성의 삶과 마찬가지로, 납작한 상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잡지 표지의 여성이 도시 빈민의 나태함의 상징이었다면, 하든은 가부장적 끈기의 상징이었습니다. 다만 언제나처럼, 복지 수당을 받는 흑인 여성들은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다루어졌습니다.

버나드칼리지 소속의 역사학자 브페밀라 네데이슨은 저서 “복지권 운동을 다시 생각하다(Rethinking The Welfare Rights Movement)”에서 복지 축소는 데이터보다 일화나 인종주의적 함의를 담은 암시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합니다.

캐리커쳐화 된 복지 수혜자의 사례로 가장 악명높은 것은 아마도 린다 테일러일 것입니다. 시카고 남부 빈민가 출신의 사기꾼이었던 테일러는 미디어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70년대 “복지 여왕(welfare queen)”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습니다. 로널드 레이건은 실패한 첫 대권 도전 당시, 테일러의 이미지를 복지 제도 악용과 정부 예산 낭비의 상징으로 활용했습니다. 하지만 테일러의 인생 스토리 역시 훨씬 복잡하고 어두운 것이었죠.

린다 테일러의 인생을 재조명한 저서를 출간한 조시 레빈에 따르면 복지 수당 부정 수령은 테일러가 저지른 수 많은 범죄 가운데 사소한 축에 속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어떤 집단이나 부류를 대표하는 사례가 되기에 너무 특이한 케이스였다는 것입니다. 레이건이 테일러를 흑인 여성이라고 특정지어 명시한 적은 없지만 그의 말 속에는 분명히 인종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테일러의 인종 정체성은 확실치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백인, 아버지는 흑인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본인은 다양한 가명 아래 각종 사기 행각을 벌이며 필요에 따라 필리핀계, 라틴계, 백인, 흑인 등 다양한 인종 정체성을 내세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를 “복지 여왕”의 상징으로 만든 것은 흑인 여성이라는 정체성이었습니다.

어두운 아이러니는 흑인 여성들이 복지 정책의 수혜를 받지 못하던 때부터 복지 수혜자의 얼굴로 인식되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복지 정책은 뉴딜 시대의 “피부양 아동 지원 제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남편이 사망했거나 일을 할 수 없는 경우 여성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제공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정책을 만든 사람들은 그 수혜자를 남편을 잃은 백인 여성으로 보았다는 것이 역사학자 네데이슨의 설명입니다. 가난한 흑인 여성들은 수당을 신청해도 거절당하는 일이 잦았고, 수당을 지급 받게 되더라도 조건이 붙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례로 남부에서는 목화 수확 시즌이 되면 흑인 여성에 대한 수당 지급을 중단하기도 했죠. “흑인 여성의 자리는 가정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존재가 아니라 노동력으로 인식되었던 것이죠.”

흑인들이 남부를 떠나 북부의 도시로 대거 이동하고 민권 운동이 진행됨에 따라 복지 정책의 차별적인 요소들도 조금씩 바뀌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가난한 흑인 여성들이 복지 정책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 조금은 쉬워졌죠.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복지 제도의 가장 큰 수혜 집단은 백인임에도 불구하고, 수혜자의 상징은 늘 어두운 피부색을 한 여성들이었습니다. 식료품 쿠폰과 같은 지원 정책에 대한 반발도 커져가기 시작했죠. “60년대에 들어오면서 수혜자 가운데 흑인 여성의 비율이 높아지자 정책입안자와 언론, 일반 백인 시민들 사이에서 우려가 터져나오기 시작합니다.”

“라이프(Life)”지는 남부에서 북부로 이주하여 복지 정책의 혜택을 입는 흑인들에 대한 기사를 실었고, 쇠퇴 중인 산업 도시의 당국자들은 도시 경제악화의 주범으로 복지 수혜자들을 꼽기 시작했습니다. 흑인 복지 수혜자들에 대한 멸시가 “복지 여왕 때리기”가 등장하는 사회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지만, 복지 정책의 지원을 받던 흑인 여성들 가운데는 복지의 개념을 재정립하기 위해 투쟁을 벌인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복지가 필요악이 아니라 보장된 권리라면서, 지원이 필요한 이들에게 훨씬 더 폭 넓게, 징벌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제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조니 틸먼도 그러한 여성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여섯 자녀를 둔 이혼녀 틸먼은 1959년 아칸소를 떠나 LA로 이주했지만, 더 이상 일을 하기 힘든 건강 상태가 되자 복지 수당을 신청했습니다. 그녀의 집을 방문한 담당자는 신고하지 않은 소득이나 동거 중인 남성의 흔적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살림살이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모욕감을 느낀 틸먼은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과 함께 사회복지사들의 태도 개선을 요구하는 운동을 조직했죠.

틸먼과 같은 운동을 펼친 여성들은 미국 곳곳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행진과 점거 활동에 나서고, 당국을 고소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원 확대와 공무원들의 경칭 사용, 다른 주로 이사를 가도 지원을 그대로 받을 수 있는 권리 등을 요구했습니다.

60년대 중반, 존슨 대통령이 빈곤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이들의 활동은 보다 조직화된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버몬트대학의 역사학자 펠리시아 콘블루는 주류 여성 해방 운동의 주체가 젊은 중산층 백인 여성들이었던 것과 달리 복지권 운동은 이민자, 원주민 커뮤니티의 흑인 여성들 중심으로 진행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들의 관심사 역시 주류 페미니즘 운동가들과는 달랐습니다. 정부는 복지 수혜 여성들이 아이를 더 낳거나 남성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 수당 지급을 중단했는데, 이들은 여성이 누구와 섹스를 하거나 동거할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도록 이런 관행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에는 심지어는 아이를 더 낳지 못하도록 강제 불임 수술을 당하는 복지 수혜 여성들도 있었죠. 이처럼 복지권 운동가들도 여성의 성적 자유와 생식의 자유를 외쳤지만, 대학 교육을 받은 주류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와는 배경과 결이 달랐습니다.

복지권 운동가들은 빈곤 역시 여성의 문제로 다루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은 복지를 정부가 보장할 권리라고 주장했고, 나아가 보편적 기본 소득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이들은 가난한 여성이 수입 여부, 구직 활동 여부와 관계없이 아이를 기를 수 있도록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습니다.

60년대 말이 되자, 전미복지권기구(National Welfare Rights Organization)은 수 백 곳의 지부에 회비를 내는 회원만 25000여 명에 달하는 조직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를 미국 역사상 최대의 흑인 페미니스트 조직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거침없는 주장과 비주류적 목표 의식은 백인 페미니스트와 리버럴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동시에 흑인 여성의 자립과 결정권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적 면모가 남성중심의 블랙 파워 운동과도 대립각을 이루었죠. 한편 백인 노동자 계급 역시 더 많은 수당과 존엄성, 자립을 요구하는 당당한 흑인 여성들의 모습에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70년대 중반에 이르자 복지권 운동은 우선 순위를 둘러싼 내부 갈등과 복지 확대에 대한 여론 악화 등으로 인해 점차 위축되기 시작합니다. 지지 의사를 보이던 정치인들도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감지하고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죠. “복지 여왕” 린다 테일러가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 바로 이 시점이었죠.

빌 클린턴이 “기존의 복지는 끝”이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온 1996년에는 일부 좌파와 흑인 의원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대세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주류 여성계 역시 여성도 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오랫동안 펼쳐왔기 때문에 복지 제도를 축소하려는 정부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 콘블루의 해석입니다.) 클린턴 정부의 복지 개혁안이 어떤 여파를 가져왔는지는 여전히 논란의 주제지만, 분명한 것은 빈곤을 줄이는데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복지의 혜택들 누리는 빈민의 수가 크게 줄었다는 것입니다.

클린턴의 개혁안에 반대 목소리를 내었을 복지권 운동은 그 시점에 거의 소멸된 상태였습니다. 전미복지권기구는 70년대 중반에 해체되었고, 결혼이나 수입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나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구를 이끌던 운동가 조니 틸먼은 클린턴의 개혁안이 시행되기 한 해 전 69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복지 제도를 어떻게 개혁해야 할지를 경험을 통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사람들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틸먼은 한 때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나는 흑인 여성입니다. 나는 가난한 여성입니다. 나는 뚱뚱한 여성입니다. 나는 중년 여성입니다. 나는 복지 수당을 받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당신이 이 중 하나에 해당된다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습니다. 모두에 해당된다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됩니다.”

틸먼과 같은 가난한 흑인 여성은 전국적인 주목을 받는 순간 그는 납작한 통계나 과장된 상징이 되어버립니다. 애초에 전국적인 주목을 받는 일이 거의 없기도 하지만요. (N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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