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2050년을 위해 인류가 준비해야 하는 것(2/3)
2부: 변화는 시작되었다
학교는 너무 많은 정보를 주입하는 것 외에도 미분방정식 풀이나 C++ 프로그래밍, 시험관의 원소 식별과 중국어 대화 같은 특정한 기술을 가르치는데 너무 전문화되어 있습니다. 2050년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앞으로 어떤 기술이 가치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C++ 프로그래밍이나 중국어 대화에 너무 많은 자원을 투자하고 있지만, 막상 2050년이 되었을 때,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프로그래밍을 더 잘하며, 새로운 구글 번역 앱이 만다린, 칸토니즈, 하카를 거의 불편함 없이 통역해줄지 모릅니다.
그럼 지금 우리는 어떤 기술을 가르쳐야 할까요? 많은 교육 전문가들은 학교가 다음의 “네 가지 C”, 곧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의사소통(communication), 협력(collaboration), 창의력(creativity)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곧, 학교는 구체적인 기술 교육을 줄이고 보다 범용적인 삶의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정신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2050년의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제품을 발명하는 능력 못지 않게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재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변화의 속도와 함께 경제적 변화 외에 “인간의 조건” 또한 변화하고 있습니다. 1848년, 공산당 선언에는 “모든 확실한 것들이 공기중으로 사라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사회경제적 구조였습니다. 2048년에는 물리적, 인지적 구조 또한 공기중으로, 혹은 데이터 클라우드 속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1848년에는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농장에서 직장을 잃었고,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도시로 옮겨갔습니다. 하지만 공장에서도 자신의 성별을 바꿀 필요나 새로운 감각을 개발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직물공장에서 일자리를 찾고 나면 남은 인생은 그 일을 하며 보낼 수 있었습니다.
2048년 사람들은 어쩌면 가상 공간으로 이주해야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별 역시 바뀔 수 있으며 인체에 이식된 컴퓨터에 의해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하게될 수 있습니다. 3차원 가상 현실 게임에서 최신 의상을 디자인하는 직업이 이미 존재하며, 10년 내로 이 특정한 직업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예술적 감각을 필요로 하는 직업에 인공지능이 도입될 수 있습니다. 즉, 25살 때 연애 사이트 프로필에 “런던의 옷가게에서 일하는 25살의 이성애 여성”이라고 썼던 여인이 35살 때는 “나이는 조정 중이고 성별도 따로 없음. 뉴코스모스 가상세계에서 신피질 활동을 하며, 인생의 목적은 지금까지 어떤 패션 디자이너도 가보지 못한 영역을 가보는 것”이라고 쓰게될 수 있습니다. 45살 때는 연애나 자기소개라는 개념 자체가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어 있을 겁니다. 그저 적절한 알고리듬이 내게 딱 맞는 상대방을 찾거나 – 아니면 만들어 – 줄 겁니다. 패션 디자인 예술 분야는 알고리듬이 너무나 발달한 나머지 과거 당신이 만들었던 가장 뛰어난 작품 조차도 자부심 보다는 창피함만을 느끼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45살이면 아직도 지켜보아야 할 세상의 급격한 변화를 충분히 더 남아 있습니다.
위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누구도 우리가 보게될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미래도 실제 진실과는 거리가 멀겁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21세기 중반의 세상을 설명하고 그 내용이 마치 과학 소설처럼 느껴진다면, 그 예측은 틀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다른 이가 21세기 중반을 당신에게 설명하는데 그 내용이 전혀 과학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건 확실히 맞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어떤 구체적인 미래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오직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이 변할 것이라는 사실 뿐입니다.
이러한 심오한 변화는 삶의 기본적인 구조마저도 그 가장 확실한 특징을 바꾸면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인류가 문명을 만들기 전의 오랜 과거부터 인간의 삶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일을 배우는 시기와, 그 일을 하는 시기입니다. 삶의 전반부에 우리는 지식을 축적하고, 기술을 갈고 닦으며, 세상을 보는 관점을 세우고,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었습니다. 열 다섯살의 나이로 학교를 가지 않고 하루 종일 가족이 소유한 논에서 일하더라도, 그 시기 가장 중요한 것은 논 농사를 하는 방법과, 대도시에서 온 욕심 많은 곡물 매매상을 상대하는 법, 옆 논의 주인과 물과 땅을 두고 생기는 충돌을 해결하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삶의 두 번째 시기에는 그동안 갈고 닦은 기술을 바탕으로 돈을 벌며 세상을 탐험하고, 사회에 기여하게 됩니다. 물론 50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쌀에 대해, 상인과 이웃에 대해 배울 수 있지만, 이는 일찌감치 배웠던 내용을 조금더 섬세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21세기 중반의 세상에서, 급격한 변화의 속도와 길어진 수명은 이러한 과거의 모델을 무용하게 만들었습니다. 인생은 점점 더 잘게 쪼개지며, 각 구간은 연속적이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는 그 어느때 보다도 더 중요하고 복잡한 질문이 되었습니다.
이는 엄청난 수준의 스트레스를 포함합니다. 변화는 언제나 스트레스를 동반하며, 일정한 나이 이후 사람들은 변화를 꺼려하게 됩니다. 15세의 아이에게 세상은 끊임없이 바뀌는 것입니다. 신체가 자라고 생각이 깊어지며,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모든 것이 변화하며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개발하는데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십대는 이를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이를 신나는 일로 즐깁니다. 그러나 50살이 되면, 이제 변화는 두려운 것이 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과 싸우기를 포기합니다. 이미 가 보았고, 직접 해 보았고, 남은 것은 티셔츠 뿐입니다. 안정적인 삶을 선호합니다. 지금 가진 기술과 경력, 정체성과 세계관에 너무 많은 투자를 했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들일수록 이를 포기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새로운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나갈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50대에는 자신의 정체성과 인격을 크게 바꾸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뇌과학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비록 성인의 뇌 또한 과거 우리가 알고 있던 것 보다는 더 유연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지만, 십대의 유연한 뇌에는 비할 수 없습니다. 뉴런을 다시 연결하고 시냅스를 추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21세기는 안정성을 추구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정체성을, 직업을, 세계관을 바꾸지 않는다면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뒤떨어진 사람이 될 뿐입니다. 기대수명의 증가는 당신을 살아있는 화석으로 만들지 모릅니다. 이제 50살은 충분히 젊은 나이일 것이며, 따라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 단순히 경제적인 면을 넘어 사회적으로 – 항상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자신을 재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소함이 새로운 표준이 되는 시대에 당신의 과거 경험과 다른 모든 인류의 과거 경험은 예전처럼 믿을 수 있는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개인으로써의 한 사람과 전체 인류는 초지능 기계나 강화 신체, 인간의 감정을 믿을 수 없이 정밀하게 조종하는 알고리듬, 인류에 의한 기후 격변, 매 십년 마다 직업을 바꾸어야 하는 급격한 변화 등 지금까지 어떤 인류도 겪어보지 못했던 것들을 대해야 합니다. 완벽하게 전례가 없는 이런 상황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막대한 양의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고 이를 흡수하거나 분석할 방법이 전혀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엄청난 불확정성이 세상의 우연한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특성일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지적 적응력과 충분한 감정적 균형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당신이 가장 잘 아는 영역을 때로 포기해야 하며,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를 편안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불행히도, 아이들을 알 수 없는 것들에 익숙해지게 만들고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게 만들도록 가르치는 것은 물리학 공식이나 1차대전이 발발한 이유를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는 것으로 회복 탄력성(resilience)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교사들 역시 20세기 교육을 받았으며, 이때문에 21세기가 요구하는 지적 유연성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산업혁명의 결과 우리는 마치 생산라인과 같은 교육 시스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을 한 가운데 커다란 콘크리트 빌딩이 서 있고, 내부에는 수많은 동일한 교실이 있으며, 각 교실에는 책상과 의자가 일렬로 늘어서 있습니다. 종이 울리면, 같은 해에 태어난 서른 명의 아이들과 함께 그 중 한 교실로 들어가게 됩니다. 매 시간, 어른 한 명이 들어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 일로 정부에서 봉급을 받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지구의 형태를 이야기하고, 다른 이는 인류의 역사를, 또다른 이는 인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비록 인류가 이 방법으로 커다란 진보를 이루어냈다는 것을 부정할 이는 없겠지만, 이제 이 모델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쓸만한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캘리포니아 교외와 같은 선진국 뿐만 아니라 멕시코 시골에도 적용가능한 모델은 없습니다.
(와이어드, Yuval Noah Har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