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번역] 푸틴 치하 18년, 푸틴 세대의 역설
Anton Troianovski, 워싱턴포스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침공한 지 닷새째입니다. 어제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는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이 러시아를 스위프트(SWIFT)에서 퇴출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정리해 올렸습니다. 오늘은 이어 러시아 내 반전 여론과 푸틴의 입지에 관해 분석한 글을 올렸습니다.
4년 전에 뉴스페퍼민트에 소개했던 워싱턴포스트의 기사를 다시 소개합니다. 20년 가까이 (지금은 20년 넘게) 러시아를 철권 통치하던 푸틴의 가장 든든한 지지 세력은 젊은 세대였습니다. 푸틴을 지지하는 젊은이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당시 네 번째 대통령직에 도전했던 선거를 전망한 기사였습니다. (푸틴은 모두가 예상한 대로 큰 표 차이로 당선됐습니다.)
전황이 계획한 대로 전개되지 않자 푸틴 대통령은 핵무기 운용 부대에 경계 태세를 강화하라고 지시했고, 전 세계 각국은 대러시아 제재를 강화하고, 반전 운동도 격화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이 어떻게 끝나느냐에 따라 푸틴의 입지는 근본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4년 전 기사지만, 전쟁을 감행하기까지 푸틴을 지탱해온 국내 지지 세력에 관해 이해하는 데 이 글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대학생 예카트리나 마메이는 시내 버스로 등교하는 시간을 활용해 스마트폰으로 독립 매체의 기사를 훑어봅니다. 러시아의 권위주의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기사를 보면서 역설을 느끼죠. 러시아의 “푸틴 세대”라면 누구나 직면하고 있는 역설입니다. “러시아의 혼은 나라에 짜르처럼 강력한 정치인이 있기를 바랍니다.” 졸업 후 언론인을 꿈꾸는 예카트리나는 자국의 언론이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다가오는 선거에서 푸틴에게 표를 던질 생각입니다.
푸틴이 정권을 잡은지도 어언 18년, 예카트리나 또래의 젊은이들은 푸틴 이전의 러시아를 알지 못합니다. 일부는 반정부 시위에 나선 경험이 있지만, 대다수 젊은이는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푸틴을 받아들이게 됐다는 것이 사회학자들의 분석입니다. 설문조사 결과를 봐도 젊은이들의 푸틴 지지세는 러시아 사회의 평균을 상회합니다.
KGB 출신의 65세 정치인 블라디미르 푸틴은 오는 3월 18일, 네 번째 임기에 도전합니다. 그가 혼란스러운 신생 민주 국가를 권위주의 체제로 굳힐 수 있던 비결은 언론과 사법부를 단단히 장악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이 그를 지지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푸틴의 정적들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지난 연말 실시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성인들 가운데 푸틴을 지지한다는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81%에 달했습니다. 18~24세에서는 지지율이 86%였죠. 인터넷을 통해 역사상 가장 많은 외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세대가 바로 푸틴의 권위주의 정부를 든든히 뒷받침하고 있는 겁니다.
러시아의 청년들은 푸틴의 반대파 탄압에 천착하는 대신, 인터넷 사용, 해외 여행, 열린 구직 시장 등에서 개인적인 자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국영 TV를 프로파간다 방송으로 치부하면서도 “미국에 맞설 강한 러시아가 필요하다”는 국영 매체의 주장을 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죠. 여기에는 위기의 1990년대나 소비에트 시절과 같이 경험한 적 없는 시절에 대한 집단적인 두려움도 작용했을 겁니다.
지난해 유튜브 상의 비리 폭로 영상을 중심으로 푸틴의 정적 알렉세이 나발니를 지지하며 시위에 나선 청년들이 헤드라인을 장식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를 아랍의 봄과 같은 대규모 안티 푸틴 운동의 전조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합니다. 급진적인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의 수가 충분히 많지 않고, 서구의 환상과 달리 가장 보수적인 세대가 바로 자라나는 청년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카자흐스탄과의 국경 지대에 있는 인구 30만 명의 도시 쿠르간에 사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현상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는 대선에서 희망, 체념, 공포가 뒤섞인 마음으로 푸틴을 찍겠다고 결정한 이들입니다. 이들이 어른들로부터 들은 1990년대 이전은 그야말로 극단적인 혼란과 폭력의 시대입니다. 버스나 극장에서 누군가 내 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로 사람을 때려 죽이던 시절이죠. 예카트리나의 아버지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나는 어머니보다 잘 살았고, 내 딸은 나보다 더 잘살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예카트리나의 소원도 바로 이것입니다.
언론인을 꿈꾸는 예카트리나는 정부에 비판적인 독립 언론 매체를 팔로우하며, 국영 매체는 프로파간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언론이라는 게 세상 어디나 다 그렇지 않나요. (국영 매체는) 우리가 미국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길 원하겠지만, 미국 언론은 또 러시아를 나쁘게 그리겠죠.”
예카트리나는 억압된 언론 환경을 푸틴의 탓으로돌리는 대신, 체제 안에서 경력을 쌓을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지역의 청년 푸틴 팬클럽에 가입해 언론 사무장 역할을 맡은 것입니다.
18세의 청년 사업가 드미트리 샤부로프는 처음 시골에서 쿠르간으로 왔을 때만 해도 초밥과 피자 배달, 택시 운전으로 생계를 꾸렸지만 지금은 “클라우드 투자” 사업을 차렸습니다. 앞으로는 모스크바 진출도 계획하고 있죠. 드미트리도 서구 국가들과 비교하면 러시아에서 개인의 자유가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 누릴 수 있는 자유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원하는 직업을 택할 수 있고,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하죠.
드미트리도 나발니의 폭로 내용, 또 반정부 시위에 참여한 “할머니와 아이들”이 끌려가는 모습에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중대한 시기에 검증되지 않은 나발니 같은 정치인을 중요한 자리에 올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변화를 추구하다가는 나라가 무너질 거예요. 과거를 돌아보면 현상 유지가 낫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상황이 지금보다 더 나빴고, 언제든 다시 그렇게 나빠질 수 있다’는 두려움은 푸틴 세대가 공유하는 정서입니다. 작년에 대학생 6천 명을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응답자 대부분은 부모 세대보다 자신들이 더 많은 기회를 누리고 있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불확실한 미래와 세계 전쟁의 위협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정서가 현상 유지를 단단히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 연구진의 분석입니다. 같은 연구에서 응답자의 47%가 푸틴에게 투표하겠다고 답한 반면, 야당 후보인 나발니를 지지하는 학생은 2%에 그쳤죠. 자신이 기억하는 인생 전부를 푸틴 치하에서 보냈고 그 삶이 딱히 나쁘지 않았는데, 새로운 지도자가 들어서면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니까요.
연출가를 꿈꾸는 파벨 리빈은 쿠르간의 동네 극장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지붕에 난 구멍 때문에 눈과 죽은 새가 바닥에 잔뜩 떨어지곤 했지만, 푸틴이 실시한 지역 발전 프로그램 덕분에 극장은 리모델링을 거쳐 근사한 공간으로 거듭났죠. 빨간 뿔테 안경에 보우타이를 맨 멋쟁이 청년은 푸틴의 가장 큰 업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로 번지지 않게 막아낸 것을 꼽았습니다. “지금은 훌륭한 군대가 국경에서 러시아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죠. 다른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그게 유지되리란 보장이 있을까요?”
러시아보다 훨씬 작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안보에 위협이라는 주장은 서구인들에게 우습게 들리지만, 국영 TV는 이를 늘 커다란 위협으로 부각해왔고, 파벨 같은 젊은이들 가운데는 국영 TV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는 2016년 미국 대선에 러시아가 개입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말합니다. “영국이 러시아 대선에 개입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어봤어요.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요.”
젊은이들의 푸틴 지지 성향에 대해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지역 대학에서 언론학을 가르치며 국영 방송국에서 일하는 알렉세이 데도프는 젊은이들이 단순히 또래와 어울리기 위해 푸틴을 지지한다고 말합니다. “지금의 트렌드는 애국주의거든요. 하지만 트렌드가 바뀌는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예요.”
하지만 러시아 청년들의 현상 유지에 대한 선호는 단순히 대통령 선거에서 푸틴을 지지하는 것 이상입니다. 예카트리나와 드미트리, 파벨과 같은 젊은이들의 눈에 크렘린의 오랜 전략인 “관리 민주주의”는 잘 작동하고 있으니까요. 러시아에 언론의 자유가 있냐는 질문에 파벨은 TV의 시사 프로그램을 예로 듭니다. 패널로 출연하는 언론인과 정치인들이 서로에게 욕설을 퍼붓지만 아무도 푸틴을 비난하지는 않는 프로그램들이죠. “사람들이 온갖 미친 소리를 다 하잖아요. 그걸 보면 분명 언론의 자유가 있는 거죠.”
쿠르간의 나발니 지지자들도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청년입니다. 그들의 눈에 푸틴 지지자들은 “현상 유지”가 실제로는 “현상 악화”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눈가리개를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경제 성장은 둔화되고, 대선 후 정치 탄압은 더욱 심해질 거라고 그들은 경고합니다.
그럼에도 평생 푸틴 말고 다른 대통령을 겪어본 적이 없는 드미트리는 미지의 세계로의 이동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같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