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군체생물로 진화하고 있는가? (2/2)
집단 지성으로의 초대
이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무엇이 개미나 인간과 같은 다세포 생물을 초유기체를 만드는 것일까요? 생물학자 베르트 휠도블러와 E.O. 윌슨은 이 과정이 유전자의 진화와 환경의 압력을 포함한 복잡한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벌과 같은 곤충은 꿀이나 꽃가루처럼 다양한 종류의 먹이를 저장하기위해 군체를 이루게 됩니다. 그 시점에서 군체는 개인보다 더 높은 생존 확률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효모가 눈송이가 되는 것처럼, 개인이 군체가 되는 더 큰 전환점은 바로 두 벌이 서로의 노동을 분업할 때 입니다. 휠도블러는 최초의 노동 분업으로 벌 한 마리가 자식을 낳고, 다른 벌이 이를 돌보게 되는 시점을 꼽습니다. 곧, 군체의 생존을 위해 개체가 자신이 직접 자식을 낳는 능력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번식 계급과 일꾼 계급이 나뉘게 됩니다. 전형적인 벌 사회에는 어린 벌을 돌보는 벌이 있고, 꿀을 만드는 벌이 있으며, 음식을 구해오는 벌이 있습니다. 이는 시작일 뿐입니다. 고도로 발달한 개미 사회에는 농부 개미, 쓰레기 청소부 개미, 그리고 특별한 음식을 먹어 더 크게 성장하는 싸움꾼 개미 등 수많은 계급이 있습니다.
이 곤충 사회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비록 우리가 여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실제 여왕이나 어떤 지배계급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왕은 그저 군체 전체가 유전적 동일성을 가지도록 (다세포 효모의 경우처럼) 번식 계급의 역할을 맡아 자식을 계속 생산할 뿐입니다. 오히려 각각의 일꾼은 휠도블러가 “알고리듬”이라 명한, 다른 곤충들과의 의사소통 내용과 자신의 계급에 따라 (예를 들어 벌은 나이를 먹어가며 다양한 계급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의 일에 필요한 판단을 스스로 내리게 됩니다. 군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조종하는 개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군체 사회, 혹은 초유기체는 개체가 자신의 번식 능력을 포기하고 노동을 분업하게 될 때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종종 다양한 종류의 먹이를 저장해야 하거나, 많은 포식자가 존재하는 환경의 압력에 의한 반응으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군체는 그런 환경에서 개체보다 더 적합하기 때문에 살아남는 것이며, 환경이 바뀔 때 군체가 다시 개체로 돌아간 여러 예가 있습니다.
인간 초유기체
이제 인간이 군체 생물로 진화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여러 과학소설에서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소설 안에서 인간은 마치 벌이나 개미처럼 조직을 위해 충성하는 어떤 집단을 만납니다. 그 집단에 속한 개인은 자신의 생명을 포함해, 집단의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스타트렉에 나오는 보그 족은 우리가 상상한 그런 사회의 한 예입니다. 그럼 인간이 과연 그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을까요?
비록 우리의 도시는 군체와 매우 비슷하지만, 스트라스만은 여기에 매우 회의적입니다. “인간 집단이 하나의 유기체가 되기위해서는 분쟁이 없어야하고 협력이 많아야합니다. 이는 유전적 근친도가 매우 높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많은 분쟁이 일어나고 있지요.” 그녀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행동하는 협력 집단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복제이며, 인간은 유전적 복제와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합니다. 그녀는 또한, “인간을 한 번 보세요. 얼마나 많이 싸우는지. 나는 사람들이 더 유기체 같았으면 좋겠어요.”
몇 백 세대만에 다세포 효모가 출현하는 것을 지켜본 트라비사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와 래트클리프는, 적어도 실험실에서는, “보다 작은 유기체”가 개인에서 군체로의 변화가 쉽게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곧 우리 내장 속에 존재하며 우리의 생존을 도와주는 미생물 생태계를 생각하면 인간은 이미 군체 생물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스트라스만의 의견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곧, 유기체가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그리고 다세포에서 군체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유전적으로 동일하거나 매우 유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군체 생물로 만들기 위해서는 복제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필요할지 모릅니다. 혹은, 2007년 휠도블러가 와이어드의 브랜든 카임에게 말한 것처럼, 매우 정교한 노동의 분업으로 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들 사회 체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은 노동의 분업입니다. 한 번 이 과정이 진화적으로 일어나면, 이들의 성공률은 크게 올라갑니다. 거의 모든 사회에서 이는 진실입니다. 고도의 노동 분업이 일어나면, 바로 이 노동의 분업으로 인한 크나큰 성공을 누리게 됩니다. 두번째는, 일단 사회가 유기체처럼 바뀌고 나면, 이들이 매우 긴밀하게 서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휠도블러조차도 인간은 군체를 만들기에는 너무 다툼에 익숙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를 부적응적이라고 부릅니다.
만오천 년 전, 우리는 수렵채집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는 내집단 충성과 외집단에 대한 차별을 익혔습니다. 이는 적응입니다. 우리가 같은 집단 사람들을 알아보고, 또 외부인을 구별하게 진화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외국인 혐오에 이런 배경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 본능은 이제 극히 부적응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우리의 외국인 혐오가 우리를 개체로 계속 묶어두게 될까요? 어쩌면 그럴 수 있겠지요. 혹은, 우리는 이미 군체 생물이 되기 위한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고도로 복잡한 노동의 분업을 이루었고,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저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인간의 근친교배를 지적한 한 집단 생물학자의 말처럼, 유전적으로 서로 매우 가깝습니다.
그럼 무엇이 인간이 초유기체가 되는 것을 막고 있을까요? 어쪄면 우리는 아직 원시적인, 집단 의식을 충분이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혹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적어도 지금 이 시점에서는, 집단 의식에의 투항과 반항 사이의 갈등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이든, 가까운 시일 내에는 인간이 군체 생물로 진화하지는 않을 듯 합니다.
(기즈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