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퇴진 요구 서울 도심에 울려퍼지다
옮긴이: 어제(12일) 서울 광화문 일대를 뒤덮은 시민들의 함성과 촛불 물결을 주요 외신들도 앞다투어 보도했습니다. 최순실이란 인물이 국정에 개입한 정황과 그간 시민들 사이에 쌓여 온 분노를 다각도로 조망한 내용은 대개 비슷했습니다. 외신들은 대개 당장 박 대통령이 권력을 내려놓고 물러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면서도 사상 최대 규모의 집회가 평화적으로 열린 만큼 검찰을 비롯한 정권 전체가 받는 압박도 상당할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오늘은 워싱턴포스트의 관련 기사 전문을 번역해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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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지에서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시민들이 서울로 모였다. 토요일 밤 서울 도심에서 평화 시위를 벌인 이들은 노래와 구호를 외치고 팻말과 플래카드를 펼쳐 보이며 잇단 스캔들에 휩싸인 박근혜 대통령은 즉시 물러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총 백만 명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집회와 시위가 잦은 한국임을 고려하더라도 지난 10여 년 넘도록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가장 큰 규모의 집회였다. 부패 추문에 이른바 비선 실세가 국정을 좌지우지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심각한 압박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부분 전문가는 박 대통령이 당장 국민의 요구대로 권력을 내려놓지는 않으리라고 보고 있다. 특히 여당과 야당, 그리고 유력 차기 대선 주자로 꼽히는 반기문 UN 사무총장도 조기 대선에 필요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전문가들은 이유로 꼽는다.
그럼에도 토요일 밤 서울 도심에 모인 시민들의 요구사항은 간명했다.
여덟 살 난 딸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집회에 나왔다고 밝힌 이유진 씨는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물러나야 합니다. 이 정권 자체가 완전히 새로 물갈이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애초에 지도자를 잘못 뽑아서 이런 일이 발생했어요. 오늘 딸 아이에게 우리가 행동에 나서면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같이 나왔어요.”
대북 정책부터 박 대통령의 의상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수많은 의사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아무런 정책 경험도 없을뿐더러 괴이한 무속 신앙과도 연결 고리가 의심되는 오랜 친구가 과도하게 개입해 왔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박근혜 정권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박 대통령의 오랜 친구는 최순실이라는 인물로, 최 씨는 박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악용해 삼성 같은 대기업으로부터 7천만 달러에 이르는 돈을 받아낸 뒤 이를 횡령한 혐의도 받고 있다. 최 씨는 현재 박 대통령의 전직 주요 청와대 참모들과 함께 검찰에 구속되어 조사받고 있다.
한국이 부패 없는 깨끗한 나라는 아니지만, 이번 스캔들에 특히 많은 시민이 크게 분노한 건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가 훼손됐고,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아무런 경험도 없으면서 사실상 대통령 행세를 했다는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검찰을 비롯한 청와대와 정권의 모든 조직이 최순실이라는 비선 권력을 견제하거나 차단하기는커녕 최 씨를 두둔해 왔다는 데도 분노하고 있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물론 여당인 새누리당 의원들 사이에서도 박 대통령이 스스로 물러나고 60일 이내에 조기 대선을 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박 대통령은 퇴진 요구를 에둘러 거절하며 2018년 2월까지 정해진 임기를 마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바 있다.
하지만 두 차례나 대국민 사과를 통해 분노를 가라앉히려 했던 박 대통령의 노력은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현재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5% 정도에 머물고 있다. 역대 한국 대통령의 지지율 가운데 이보다 낮은 기록은 없다.
어제 집회는 토요일을 기준으로는 3주 연속 일어난 집회다. 시민들이 운집한 광화문과 청계광장 일대에서 청와대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주최측은 축제와도 같은 분위기에서 평화롭게 치러진 집회에 백만 명이 모였다고 말했다. 경찰은 26만 명이 모였다고 집계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어느 경우든 앞선 토요일에 열린 두 차례 집회나 2008년 광우병 촛불 집회 때보다도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건 사실이다.
부산이나 울산 등 다른 도시에서도 사람들이 집회에 참여하러 서울로 왔고, 제주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도 1천여 명에 달했다.
학생, 여성, 노동자 농민 단체들은 삼삼오오 모여 거대한 촛불의 물결을 이루었다. 공식 행사인 총궐기 대회에는 많은 이들의 발언과 가수들의 축하 공연이 곁들여졌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폭력으로 비화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나온 부모, 휠체어를 탄 사람,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나온 가족 등 구성원도 다양했다. 어떤 이들은 아예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촛불을 밝히며 간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청와대 쪽으로 평화 행진을 벌이는 사람들은 “박근혜는 하야하라”는 내용의 가사를 붙인 구호와 노래를 불렀다.
“지금껏 정치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기 때문에, 정부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꼼꼼히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 두 명과 함께 집회에 참여한 34살 회사원 김완규 씨는 말했다. 31살 조성은 씨는 어제 처음 집회에 나왔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가급적 빨리 물러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목소리에 힘을 보태고자 나왔습니다. 박근혜는 국민을 위한 대통령이 아녜요. 단지 한 사람만을 위한 대통령이었죠.”
그 한 사람은 최순실 씨다.
트로이대학교 서울 캠퍼스의 다니엘 핑크스톤(Daniel Pinkston) 교수는 최순실 씨를 둘러싼 스캔들은 한국 사회 전반에 쌓여 있던 불만과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고 진단했다.
“최순실 게이트는 한마디로 결정타였습니다. 노사 관계, 대학 등록금, 실업률, 경제 불평등과 불안정한 일자리 등 수많은 문제로 신음하던 사람들이 끝내 거리고 박차고 나오게 된 거죠.”
청와대 대변인은 이번 집회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요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어제 이어 오늘도 관련 긴급회의를 열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연합뉴스에 “국민의 분노가 워낙 엄중하기 때문에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고민하면서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워싱턴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