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한국 정부는 왜 역사 교과서를 새로 쓰려고 하나?
한국에서 역사는 그저 학계에서 진위를 가려내고 연구하는 그런 분야가 아니다. 많은 국민이 역사 문제에 관심을 갖고, 또 이와 관련된 일을 상당히 민감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한국의 중도우파 정부는 좌편향된 역사 교과서를 바로잡고 정부가 승인한 역사교과서로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교과서 편찬 과정을 새로 짜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현재는 검정을 통과한 다양한 역사 교과서가 있고, 각 학교가 자율적으로 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현재 교과서들 가운데 몇몇 부분 내용이 잘못된 곳이 있습니다. 이 부분의 잘못된 역사 서술을 바로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역사교육정상화추진단의 박성민 부단장은 BBC에 국정화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현재 문제의 잘못된 부분을 서술한 교과서 집필진이 수정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정부가 직접 잘못된 내용을 바로잡으려는 겁니다.”
학생들이 읽는 교과서가 “무엇보다도 세계사에 유례없이 빠른 기간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룩한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 장관도 있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현재 교과서들이 북한을 지나치게 미화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어떤 교과서를 보면 북한에 관해 서술하는 부분에는 ‘독재’라는 단어가 두 번밖에 나오지 않지만, 남한에 대해서는 ‘독재’라는 단어가 28번이나 나옵니다.”
정부의 국정화 계획에 한국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규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연세대학교 문정인 교수는 BBC에 “왜 역사 교과서에 단 하나의 목소리만 실어야 합니까? 다양한 시각을 소개하고 학생들이 선택해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제대로 된 역사 교육입니다. 역사란 원래 다양한 해석의 학문이기도 합니다.”
런던대학교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오웬 밀러 교수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역사라는 것이 국민에게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심는 도구여야 합니까? 아니면 반대로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거기서 교훈을 찾아낼 수 있는 시민을 양성하는 도구여야 합니까?”
정부의 국정화 시도가 더욱 논란이 되는 이유는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기 때문이다. 1979년 암살당한 박 전 대통령 자체가 논란의 인물이다.
육군 장성 출신으로 1961년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집권 기간 내내 보안기관을 동원해 반대 목소리를 잔혹하게 짓밟았다. 그는 동시에 아주 짧은 기간에 이룩한 한국의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끈 인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충분하지 않던 국가의 부를 그가 지목한 특정 산업의 기반을 닦는 데 쓰도록 명령했다. 그래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의 번영을 이끈 산업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박 전 대통령 생가에는 그를 기리는 커다란 동상이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이 동상은 지도자를 우상화하는 북한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동상 옆 현판과 게시판 어디에도 박 전 대통령의 잘못을 언급한 부분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가 일본강점기 만주군 장교로 임관해 일제에 부역했다는 사실을 둘러싼 논란은 물론 아예 그가 군 제복을 입고 있는 사진조차 찾아볼 수 없다.
현 정부를 비판하는 이들은 정부가 새로 쓰겠다는 역사 교과서가 이렇게 과거를 집권 세력에 유리하게 짜깁기한 것이 될까 우려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아버지의 공과 가운데 과실을 어떻게든 지워버리려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국정화 계획 자체가 무척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역사를 둘러싼 좌우의 시각이 대립하는 부분은 박정희란 인물에 대한 평가 외에도 상당히 많다. 먼저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해 보수 진영은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다는 오래된 시각을 고수하고 있지만, 진보 진영에서는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즉, 해방 후 토지 분배 문제 등을 놓고 이미 1950년 북한의 공격 이전에 곳곳에서 사실상 내전이나 다름없는 분쟁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북한을 먼저 도발을 시작한 침략자가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내전의 당사자로서 이해하고 있다.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웃 일본에서도 역사 교과서 문제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 보수진영은 아시아를 점령했던 제국주의 시절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축소하려 하고 있고, 영유권 분쟁이 한창인 지역을 명백한 일본 영토로 못 박으려 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의 역사를 둘러싼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미국 텍사스 주에서도 교육청의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 내용을 둘러싼 공청회에서 노예제에 대해 근본적인 다른 시각이 충돌하면서 감정적인, 날 선 공방이 오갔다.
텍사스 주에 사는 15살 학생 한 명이 세계지리 교과서에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를 노동자라고 기술해놓은 부분을 사진을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이는 당시 노예들이 마치 자발적으로 노동의 기회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온 것처럼 해석될 소지가 있다) 이 사진 한 장은 큰 파문을 일으켰고, 출판사 측은 해당 부분의 기술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미국에서는 역사학자가 역사 교과서 검정 과정에 지금보다 더 관여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도 토론이 계속되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에는 가상의 전체주의 정부가 내건 슬로건이 등장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독재 국가에서는 정부가 역사를 독점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정권의 입맛에 맞는 역사를 가르친다. 하지만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이 한창인 한국, 일본, 미국 텍사스 주 어디에도 전체주의 정부는 없다. 다만 이들 정부를 우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가장 걱정하는 건 역사를 다시 쓰려는 시도 자체가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는 중요하다. 역사는 정치적이다.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 또한 대단히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서울에서도, 도쿄에서도, 텍사스에서도 마찬가지다. (B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