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과학의 바벨탑(Scientific Babel)” 과학을 위한 공용어
당신이 만약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과학 연구자라면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영어는 현대 과학의 유일한 언어는 아니라 하더라도 다른 언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의 바벨탑(Scientific Babel)”의 저자 마이클 고딘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바벨탑이 필요하지 않은, 오직 하나의 언어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의 삶이 궁금하다면, 당신은 자연과학자들을 보면 됩니다. 그들은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고딘은 오늘날 과학 분야에서 영어가 절대적 위치를 가지게 된 데에는 합리적인 진보와 사람들 사이의 협력 뿐만 아니라 시대적 혼란과 우연한 사건들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과학자들은 언제나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왔습니다. 아르키메데스가 그저 욕조에서 소리치는 평범한 그리스인 이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저작들이 번역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유럽에서는 과학을 위한 공용어가 오래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바로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들이 사용한 라틴어입니다. 그러나 모든 학자들이 라틴어를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이 시대의 과학과 의학 지식의 상당 부분은 자기 나라 말로만 쓰이기도 했습니다.
라틴어는 한 때 과학을 위한 표준어로 존재했었지만, 과학자들이 스스로 이를 포기했다는 점에서 특이합니다. 물론 라틴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식물의 국제명명기호로 라틴어가 아닌 다른 언어가 허용된 것은 겨우 2012년입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유럽의 과학자들은 라틴어를 버리고 당시 떠오르던 세 언어, 곧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딘은 이 세 언어의 시대가 정점을 지난 뒤인 1850년으로 우리를 바로 데려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마 라틴어의 쇠락과 세 주요 언어의 등장에 관해서만도 하나의 책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딘은 이 내용을 책의 첫 장(‘라틴어의 흥망’)에 짧게 요약해 놓습니다. 그는 과학 언어의 완벽한 역사를 쓰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한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재미있는 이야기인 19세기 중반에서 오늘날까지의 과학 분야에서 사용된 몇몇 언어들이 겪은 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19세기의 과학자들 역시 과학계가 여러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생기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하나의 공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였습니다. 국가주의 및 언어 국수주의가 등장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독일어를 쓰지 않았고 영국인들은 프랑스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독일인들은 러시아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어떤 이들은 세계 공용어를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언어의 역사를 보면, 볼라퓍(Volapük), 이도(Ido), 에스페란토(Esperanto) (또 이디엄 뉴트럴(Idiom Neutral), 라티노 시네 플렉션(Latino Sine Flexione), 인터링구아(Interlingua))와 같은 괴상한 특징을 가졌거나 사라져버린 인공언어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고딘은 이런 인공언어들을 마치 19세기와 20세기 초의 과학자들처럼 진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1904년 만들어진 에스페란토어 과학저널은 중요한 과학저널들을 에스페란토어로 번역해 싣고 있습니다. 이 저널의 후원자 중에는 앙리 푸앙카레와 두 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딘은 20세기 초까지도 과학자들이 공용 인공언어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었다고 말합니다. 이 책에 재구성된 당시의 논의들은 매우 흥미로우며, 이 인공언어들이 단지 언어소통의 역사에서 조연만은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20세기의 세계대전은 과학계 뿐만 아니라 과학계의 공용어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1차대전 이후 독일어는 예전의 지위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영어, 프랑스어와 함께 가장 많이 사용되던 언어였던 독일어는 이제 기피와 의혹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919년에는 미국의 16개 주에서 독일어 사용이 금지되었고, 오하이오 주 핀들레이에서는 독일어를 말하는 것만으로 벌금을 내야만 했습니다. 이런 법들은 곧 사라졌지만 그 영향은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미국의 외국어 교육이 붕괴되었고, 이는 훗날 냉전 시대에 소련의 과학 논문들을 읽기 위해 기계번역을 시도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고딘은 냉전 시대 과학자들이 상대방의 연구결과를 따라잡기 위해 벌였던 “언어 경쟁(language race)”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CIA는 기계번역 연구에 공을 들였고, 번역 시장 역시 성장했습니다. 그 결과, 영어를 읽을 수 있는 과학자들은 소련에서 어떤 연구가 발표되면 6개월 이내에 이를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련의 연구가 영어로 번역되면서 단지 영어 원어민들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의 사용자들도 소련의 연구를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학계에서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를 누가 신경쓸까요? 특히 영어를 일상어로 쓰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말이지요. 2001년 네이처 셀 바이올로지의 편집장은 아래와 같이 (영어로) 말했습니다. “과학에 있어 소통을 위해 공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며, 문화적 차이를 위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비생산적인 일이다.” 어쩌면 출판물에서 언어의 벽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화학자들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분야의 논문이라면 그저 화학식만을 따라가는 것으로 다른 언어로 쓰여진 논문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할 지 모릅니다. 실제로 과학계에서 사용되는 영어는 보다 표준화되고 단순화된 영어로 일상에서 사용되는 영어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논문을 출판하고 읽는 일은 과학분야에서 이루어지는 일의 일부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이 서로 대화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가요? 원어민이 아닌 이들이 실험실에서, 학회에서, 그리고 연구자금을 요청할 때, 또 국제적 협력이 필요할 때에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까요? 고딘은 이 지점에서 언어 능력에 따른 차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이 문제를 더 깊게 파고들지는 않습니다. 다른 질문들도 떠오릅니다. 중국어, 인도어, 스페인어는 과학의 역사에 있어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이 언어들이 현재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또 미래에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요?
고딘은 여기서 책을 끝내지는 않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대한 여러 사전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지루한 부분은 거의 없지만, 2차대전 이후 독일어의 영향력이 매우 천천히 약해졌음을 설명하는 부분은 다소 더디게 진행되는 느낌입니다. 지난 200년간의 과학 언어를 설명하는 이 책은 과학의 역사를 그저 위대한 사람들의 단순한 이야기만으로 설명할 수 많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과학의 역사에 존재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킵니다.
(가디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