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격파 무슬림과 네오나치, 공통점이 더 많습니다
런던 서부 지역에서 나고 자란 이브라힘 아흐메드는 평생 지역 축구팀을 응원하고 “백인 음악”을 즐겨들었지만 학교에서는 “무슬림”이라 불리는 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영국 사회와 점점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고, 18세에 모스크에서 “모집책”을 만나 고향에서도 성전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곧장 넘어가게 되었죠. 한편, 스웨덴의 로버트 오렐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으며 자신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엇습니다. 학교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이민자들이 이제는 진보 정치인들을 등에 업고 스웨덴 문화를 망가뜨리고 있다고 굳게 믿었고, 국회의사당에 침입해 총기를 난사하는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한 때 두 사람을 사로잡았던 것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라는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면 두 사람이 극단적이고 과격한 사상에 심취했다가 여기에서 벗어나게 된 과정은 아주 비슷합니다. 두 사람은 모두 불만에 사로잡혀 자존감은 낮아진채 분노한 상태였고, 대의명분과 소속감, 그리고 불만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계획을 제공하는 서사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사법 당국이나 가족이 아닌, 한 때 과격주의자였던 “전향자”들의 설득으로 제자리를 찾았다는 것도 이들의 공통점입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최근 이슬람교의 이름 아래 벌어진 폭력으로 큰 충격을 받은 유럽에 큰 시사점을 던집니다. 현 사태에서 종교 이념은 분명 중요한 요소지만, 과격주의에 이르는 심리적인 과정은 종교와 관계없이 보편적이라고 테러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네오나치나 IS나 과격주의에 빠졌다가 돌아오는 과정에는 다른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죠.
유럽에는 극우주의자, 과격파 막시스트나 아일랜드공화국군(IRA)와 같이 폭력적인 극단주의자들에 맞서 싸운 전통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오늘날 IS의 침투를 막아내기 위해서 이런 경험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활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선, 한 때 과격주의에 가담했다가 전향한 사람들의 역할이 핵심입니다. 이들은 정부가 주지 못하는 신뢰를 줄 수 있으니까요. 과격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환상과 전혀 다른 현실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전향자들 뿐입니다. 두번째, 극단주의자들의 프로파간다를 깨뜨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손에 잡히는 “대항서사”를 제공해야 하죠.
덴마크에서는 현재 전 유럽이 주목하는 실험적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때 과격주의에 가담했던 청년들이 학교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재활 프로그램입니다. 지금은 중동에서 돌아온 과격파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적용되고 있지만, 원래는 2007년 극우주의자들을 위해 개발된 프로그램입니다. 각 국 정부는 아직 이런 프로그램의 실효성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젊은이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과격한 사상에 빠지게 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왜” 극단주의자가 되는지에 집착해서는 발전이 없고, “어떻게” 극단주의자가 되는지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죠.
로버트 오렐의 경우 모든 일이 1995년 여름밤에 시작되었습니다. 이혼한 부모를 둔 14세 소년은 이민자 가정 출신의 학교 깡패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고, 바이킹족의 정복을 소재로 다루는 펑크 락 음악에서 위안을 얻었습니다. 바이킹 티셔츠를 입고 토르신의 망치 모양 목걸이를 걸고 있던 오렐에게 “모집책”이 접근해왔습니다. 그들은 오렐에게 “스웨덴을 위해 일어서자”라고 적힌 스티커를 건넸죠. 몇 년 후 그는 네오나치와 연관된 훌리건 그룹에 몸담게 되었고 결국은 네오나치가 되어 학교를 그만두고 동지들과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검은 옷을 입고 반유대주의 팜플렛을 읽으며 주말에는 유색 인종 청소년들을 골라 폭행하는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인종이 나의 종교였죠. 내가 성전을 치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흐메드의 성전은 1997년 런던의 한 모스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파키스탄과 인도 출신의 이민자였지만, 종교적인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색인종이 거의 없는 중산층 거주 지역에서 자라면서, 학교에서 인종차별적인 괴롭힘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지키고, 또 복수하기 위해 무슬림 갱단에 가입했습니다. 어느날 그는 모스크에서 만난 사람으로부터 “영국은 전쟁의 땅이고, 너는 군인이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몇 달 후 그는 중동에 이슬람교 왕국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히즙 웃 타흐리르에 가입했죠. 2년 간 그는 영국 내 비밀요원으로 늘 총을 가지고 다녔고, 화염병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되자 두 사람에게는 의심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아리안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술과 마약을 멀리하고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는데 열중했던 오렐에게 나태한 동료들은 실망으로 다가왔습니다. 한 네오나치 단체가 경관 살해 관련 혐의로 체포되자 그는 경악했습니다. 그리고 조직을 떠나 가족과 함께 시골로 내려간 “전향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결국 그는 극우주의자들이 조직을 떠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단체인 “엑시트(Exit)”의 도움을 받으며 과격한 생활을 청산했습니다. 보스니아로 떠날 채비를 하던 아흐메드의 마음을 돌려놓은 사람 역시 한 때 갱단에 몸담았던 살라피 설교사였습니다. 그는 아흐메드에게 너의 불만을 이해하지만 폭력이 해결책은 아니라고 말했죠.
이제 오렐과 아흐메드는 모두 엑시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과격주의와의 싸움이 예전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해졌다고 말합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모집책”들이 10대 청소년들과 직통 대화 창구를 가지게 되었고, 폭력을 미화하는 비디오게임이 난무하며, 과격파들의 마케팅 전략도 훨씬 더 세련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니까요. 아흐메드는 청소년들에게 폭력의 대안을 제시합니다.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편지를 쓰거나, 지역 신문에 기고하거나, 기금 조성 캠페인을 열어보라고 조언하는 것이죠. 오렐과 아흐메드가 16세 때 만났다면 서로를 죽이려 들었겠지만, 지금 이들은 친구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과격주의가 인생의 종착점이 되라는 법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NY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