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라이쉬 칼럼] 공유경제는 이윤의 부스러기를 나눠먹는 가혹한 노동 형태
옮긴이: 로버트 라이쉬(Robert Reich)는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장관을 지낸 경제학자로 현재 UC버클리 공공정책 대학원장으로 일하며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사회에서) 소득, 재산 불평등이 심화되면 일자리가 줄어들고 중산층이 무너져 모두가 경제적으로 힘들어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는 라이쉬 교수의 주장은 다큐멘터리 영화 “모두의 불평등(Inequality for all)”을 보시면 잘 집약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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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을 컴퓨터가 미리 예측한 뒤 잘 짜놓은 각본대로 필요한 노동은 로봇이 대체하는 세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면 컴퓨터와 로봇을 소유한 자본가가 사실상 모든 이윤을 가져간다는 점일 겁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그런 세상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나타난 인간의 노동은 그 가운데 단기 예측이 쉽지 않은 일들 또는 지엽적인 노동 – 특이하고 규칙적이지 않은 업무, 배달, 운송 등 -으로 쏠리고 있습니다. 우버 기사들이 그렇고, 에어비엔비에 방을 내주는 집주인들이 그렇습니다. (인터넷으로 식료품 등을 주문하면 이를 대신 구매해 배달해주는) 인스타카트(Instacart) 구매대행업자들도 마찬가지이며, 옛날식으로 말하면 심부름 대행센터의 온라인 앱 형태라고도 할 수 있는 태스크래빗(Taskrabbit)에 자신의 이력을 등록해놓고 콜을 기다리는 이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법조계(예를 들어 Upcouncil), 의료계(예를 들어 Healthtap)에도 주문형 매칭 업체들이 성업 중입니다.
새로운 노동 형태, 새로운 업종을 일컫는 말로 ‘공유 경제(“share” economy)’가 화두가 된지도 벌써 여러 해가 흘렀습니다. 제가 보기에 공유 경제보다 더 적확한 이름은 “부스러기를 나눠갖는 경제(share-the-scraps economy)” 정도가 될 겁니다. 기술의 발전 덕분에 이 땅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서비스업이 이제는 개별적인 업무로 쪼개져 노동자들에게 (소비자가) 필요할 때 할당되고 있습니다. 노동자가 일의 대가로 받는 보수는 그때 그때 수요의 변화에 따라 정해집니다. 여기서 소비자들이 서비스와 재화를 이용하고 지불하는 요금 가운데 가장 큰 몫은 앱 또는 온라인 상에서 수요와 공급을 이어주는 소트프웨어 플랫폼 업체가 가져갑니다. 노동자들은 나머지 자잘한 부분을 나눠 받습니다.
아마존(Amazon)이 내놓은 온라인 매칭 서비스 매케니컬 터크(Mechanical Turks)를 예로 들어볼까요? 홈페이지 상에는 “사람의 지적 노동을 사고 파는 장터(a marketplace for work that requires human intelligence)”라는 설명이 붙어있습니다. 실상은 지루할 정도로 별 생각없이 처리할 수 있는 잡일을 푼돈 받고 처리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와 그런 이들을 찾는 소비자가 만나는 곳입니다. 3,000원에 상품 설명서 대신 써주기, 300원에 사진들 중에 잘 나온 사진 골라주기, 500원에 잘 못 알아보는 글씨 판독해주기 등 아주 최소한이지만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해야 처리할 수 있는 일이긴 해서 컴퓨터로 하기엔 쓸데없이 복잡하고 비용이 더 듭니다. 매번 소비자와 노동자의 수요, 공급이 맞아떨어질 때마다 아마존은 적잖은 수수료를 챙깁니다.
이런 흐름은 30여 년 전 기업들이 노동자들에게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를 제공하는 대신 비정규직, 임시계약직, 프리랜서와 같은 이름 아래 노동을 파편화시켰던 흐름의 정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노동이 파편화되고 노동자들의 단결이 느슨해지면 급여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협상력도 약해집니다. 또한 파편화된 노동 시장에서 기업들은 최저임금이나 노동 환경 개선 등 각종 규제를 더 쉽게 피해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 노동자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온전히 책임을 지게 됩니다. 추가 근무, 업무 스트레스를 완화해줄 장치가 사라진 시장에서 소비자와 직접 단기 계약을 맺는 셈이니까요. 더 멀리 보면 노동조합이라는 개념이 없던 19세기, 개별 노동자가 책임질 수 없는 위험을 감수하고도 아주 낮은 급여를 위해 파편화된 노동을 감수해야 했던 때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우버에게 운전자들의 안전과 보험 등을 책임지라고 요구했을 때 우버가 내놓은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우리는 고용주가 아니다. 운전자들은 일종의 개인사업자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사고의 책임도 개인이 진다. 우리는 플랫폼을 제공할 뿐이다.” 아마존의 매케니컬 터크에서 일을 했을 때 받을 수 있는 돈이 최저임금 기준에 한참 못미친다는 비판에 아마존도 비슷한 답을 내놓습니다. “우리는 그저 수요, 공급을 이어줄 뿐이다. (우리는 고용주가 아니므로) 최저임금이 적용되는 사업체가 아니다.”
공유 경제에 찬성하는 주장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을 물론 알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들 가운데 두드러지는 것이 “노동자가 자기 필요에 따라 원하는 만큼 ‘남는 시간’에 일해서 부수입을 버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이 주장의 문제는 바로 저 ‘남는 시간’에 있습니다. 공유 경제 하에서 노동을 제공하는 적잖은 이들이 본업으로 충분한 돈을 벌면서 용돈벌이 삼아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휴식을 취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 할 시간에 많지도 않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도록 내몰리는 추세를 사회적으로 장려해야 하는 걸까요?
우버 운전자들 대부분이 새로운 기회에 만족하며 행복해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운전자들이 정해진 시간 동안 일하고 노동의 가치에 걸맞는 임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다면 훨씬 더 행복해하지 않을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지난 30여 년간 상위 1% 또는 10%의 부는 꾸준히 축적되었지만, 중위소득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이 거의 정체돼있던 시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돈을 벌 수 있는 부수입의 기회가 매력적인 대안으로 여겨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대안이 얼마나 매력적인지가 아니라 기존의 노동과 급여 체계, 소득 분배 시스템이 얼마나 제 기능을 못했는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공유 경제 시장이 지금처럼 빠르게 성장하면, 파편화된 노동자들이 모여 일종의 조합 형태의 이익 단체를 만들어 임금이나 노동 조건에 관한 협상력을 높일 거라고 예측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조합은 사실상 노조나 다름없을 텐데 우버나 아마존 등 플랫폼을 제공하며 고용주이기를 거부하는 기업들이 이를 받아들일 거라고 믿는 건 너무 순진한 발상입니다.
공유 경제가 묻혀져 있던 소비자들의 수요를 효과적으로 끄집어내고 인간의 노동을 더욱 효율적으로 이끌어줬다며 높이 평가하는 학자들이 많지만,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노동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노동의 대가로 나오는 소득, 부를 제대로 분배하는 일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부스러기를 나눠갖는 경제 체제는 시대적 사명에 역행하는 흐름입니다. (Alter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