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엘리자베스 2세 서거와 영국 왕실
2022년 11월 17일  |  By: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  No Comment

지난 9월 14일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쓴 글입니다.

 

지난 주말,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임 기간이 무려 70년이었고, 그 기간 영국의 실질적인 국가 지도자 자리인 수상직을 거친 인물이 15명이니, 마치 영국의 군주는 늘 엘리자베스 여왕이어야 할 것만 같은 착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지구촌의 유명 인사 순위에서 빠지기 어려운 인물임이 틀림 없죠.

한편, 영국 왕실 관련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지금의 정치제도, 또 현대인으로서의 감각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왕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영국은 의회와 민주주의의 오랜 전통을 가진 국가인 동시에, 21세기에도 세습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국가 가운데 하나입니다. 게다가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느슨하고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영연방(Commonwealth)”라는 이름으로 묶여 여전히 영국 군주를 연방의 수장으로 두고 있기도 하죠.

애도의 물결 속에서 군주제의 문제점과 영국 왕실의 과오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뉴욕타임스는 9월 8일자 기사에서 이 같은 엇갈린 반응을 모아 보도했습니다. 세계 각국 지도자들이 대부분 애도와 추모를 표시하는 가운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제자유투사당은 성명을 통해 “여왕의 죽음은 남아공과 아프리카의 역사 중 매우 비극적인 기간을 상기시키므로 애도할 수 없다”며, “여왕은 영국이 전 세계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현지인들에게 가한 잔혹 행위에 대해 단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영연방의 일원인 호주에서도 여왕 사망을 계기로 공화국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이 (소수 의견이긴 하지만) 다시금 제기되었습니다. 녹색당 대표 애덤 반트(Adam Bandt)는 추모 메시지에 호주는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고, 부대표 역시 “여왕을 알았던 이들에게는 위로를 전한다”면서도 “식민 지배를 당한 이들의 목숨과 땅, 부 위에 지어진 인종차별적 제국의 수장을 추모할 수 없다”고 밝혔죠.

나이지리아 출신의 카네기멜론대 교수 우주 아냐(Uju Anya)는 “도둑질과 강간, 학살을 일삼던 제국의 수장이 드디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통이 극심했으면 좋겠다”는 트윗을 올렸다가 트위터 정책 위반으로 삭제당하기도 했습니다. “내 가족을 학살하고 난민 신세로 만든 것을 포함해 여전히 고통받은 이들이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상황에서, 여왕에게 드는 감정은 경멸뿐”이라는 이어진 트윗은 여전히 남아있죠. 언어가 과격했을지 몰라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인종차별과 폭력으로 얼룩진 영국 왕실의 제국주의 과거와 분리될 수는 없다는 지적은 아냐 교수만의 의견이 아닙니다.

영국의 과거 행적으로 인해 야기된 고통 역시 현재진행형이고요. 미시건대 교수 에보니 토머스는 식민 지배를 당한 사람들에게 식민지 통치자의 건강 상태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한다고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망자에 대한 예의를 보여라(Respect the dead)”라는 말조차 우리가 영어로 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자고 비꼬기도 했습니다.

사진=Daniel Leal-Olivas/AFP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 국민들에게 인기가 높고 호감도가 높은 왕실 인사였지만, 군주제 자체에 의문을 갖는 영국인들도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뉴욕타임스 기사는 영국 왕실과 엘리자베스 여왕의 공과를 두고 런던의 한 과자 가게에서 벌어진 갑론을박을 소개하기도 했죠.

뉴스페퍼민트는 지난 2015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머무른 군주가 되었던 시점에 나온 이코노미스트 기사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당시 기사는 군주제에 대한 세 가지 입장, 즉 반대론과 찬성론, 그리고 개혁론을 요약정리하고 있습니다.

반대 주장은 간단합니다. 세습 군주제는 민주주의 및 성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찬성론은 영국 왕실에 대한 여론의 지지, 국가 홍보 효과, 상징적인 의미와 국민 단합 등을 왕실 존립의 이유로 꼽습니다. 일종의 타협안인 개혁론은 벨기에식 개헌으로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명시하고, 군주는 타고난 권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헌법을 수호하겠다는 맹세를 통해 왕위에 오르게 하자는 의견입니다. 군주제의 존립으로 인해 영국 정치제도에 생겨난 문제점을 차차 없애나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