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선호투표제, 미국 정치 판도 바꿀까?
8월 24일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올린 글입니다.
오는 11월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주별, 선거구별로 예비 선거와 (당내) 경선(프라이머리, primary)이 한창입니다. 경선은 주로 화요일에 치러지는데, 어제(23일)는 뉴욕주 하원의원 경선이 치러졌고, 플로리다주 민주당은 공화당의 거물인 드산티스 주지사,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과 맞설 후보를 각각 뽑았습니다.
지난주 화요일(16일)에 치른 경선에서도 많은 뉴스가 나왔습니다.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건 와이오밍주 공화당 하원의원 경선에서 패배한 리즈 체니 의원일 겁니다. 와이오밍주는 주 전체 인구가 60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주로 배정된 하원 의석은 주 전체에 한 석입니다.
체니 의원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표를 던진 몇 안 되는 공화당 의원 중 한 명이자, 1월 6일 의사당 테러를 조사하는 의회 특별조사위원회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한 인물입니다. 공화당의 권력을 사유화하는 데 성공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예상대로 체니 의원을 가장 먼저 축출했죠. 트럼프는 체니의 정치 인생을 끝장내고자 와이오밍주 경선에서 2020년 대선의 승자는 바이든이 아니라 트럼프라는 거짓 주장에 동조하는 후보를 내세웠고, 66% 대 29%의 압도적인 표 차이로 체니 의원을 떨어뜨렸습니다. 체니 의원의 정치 인생과 와이오밍주 경선이 주는 메시지에 관한 이야기는 관련 칼럼과 글을 모아 다음주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트럼프는 미국의 역대 전임 대통령 가운데 퇴임 후 가장 정치적인 행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2024년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는 그는 올해 중간선거에서 거의 모든 경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트럼프의 지지를 받고 싶은 공화당 후보들은 “2020년 대선은 바이든이 아니라 트럼프가 이겼는데, 좌파들이 승리를 찬탈했다”는 말을 트럼프 앞에서 서약하거나 아예 공개적으로 해야 합니다.
뉴욕타임스가 트럼프가 지지한 220명 넘는 후보를 분석한 결과 이 가운데 159명이 “2020년 선거의 진짜 승자는 트럼프”라고 공개적으로 의견을 밝힌 이들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127명이 경선을 통과해 11월 중간선거에서 후보로 나섭니다. (16명은 경선에서 패배했고, 16명은 아직 경선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사실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지난주 화요일 선거를 치른 알래스카주 이야기입니다. 알래스카주는 2년 전 선거에서 주민투표로 선호투표제(rank choiced voting)라는 새로운 선거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이 제도에 따라 상원의원 경선을 치렀고, 3월 사망한 돈 영(Don Young) 의원의 남은 임기를 채울 하원 보궐선거를 같이 치렀습니다.
상원 경선에선 리사 머코프스키 의원이 득표율 44.3%로 가장 많은 표를 받았습니다. 머코프스키 의원은 1월 6일 의사당 테러 이후 처리된 트럼프 대통령 두 번째 탄핵소추안에 찬성표를 던진 공화당 상원의원 7명 가운데 유일하게 이번 중간선거에 나서는 의원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하는 켈리 치바카 후보가 머코프스키에 이어 2위(득표율 39.6%)를 차지했고, 민주당 파트리샤 체스브로 후보가 3위(득표율 6.2%)를 차지했습니다. 총 4명의 후보가 당적에 상관없이 결선 투표 격인 11월 중간선거에 나섭니다.
하원은 작고한 돈 영 의원의 남은 임기를 채울 후보를 뽑는 보궐선거 경선을 지난 6월에 치렀고, 그 결과 결선에 오른 후보 4명 가운데 한 명이 사퇴해 3명의 후보가 보궐선거 결선을 치렀습니다. (다음 임기 하원의원을 뽑는 경선도 동시에 치러 4명의 결선 후보를 가립니다.)
3명의 후보는 메리 펠톨라(민주, 38.2%), 세라 페일린(공화, 31.8%), 닉 베지치(공화, 28.5%)입니다. 이 수치는 선호투표에서 1순위로 꼽은 표만 집계한 것으로, 최종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CBS의 분석에 따르면, 1순위 투표에선 2위를 차지한 세라 페일린 후보가 여전히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입니다. 알래스카주 주지사를 지냈으며, 지난 2008년 대선에서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세라 페일린의 이름이 눈에 띕니다. 페일린 후보는 알래스카주에 이번에 처음 도입된 선호투표제를 가리켜 “좌파 기득권이 고안해낸 쓸데없이 복잡한 미친 제도”라며 맹비난했습니다.
거친 언사이긴 하지만, 페일린 후보의 울분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닙니다. 선호투표제 말고 원래 하던 대로 당별로 경선을 치른 뒤 공화당 후보가 돼 민주당 후보가 결선에서 맞붙었다면, 페일린 후보가 어렵지 않게 당선됐을 테니까요.
선호투표제를 미국에서 도입한 게 알래스카주가 처음은 아닙니다. 이미 메인주나 샌프란시스코시는 선호투표제로 의원과 공직자를 선출하고 있고, 뉴욕시도 지난 2020년 선거부터 시장과 시의원 등을 선호투표제로 뽑고 있죠. 뉴욕시에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뉴욕시 선관위가 만든 선호투표제 소개 영상 가운데 한국어 영상이 있습니다. CNBC가 제작한 영상에도 선호투표제의 원리와 찬반 의견이 두루 소개돼 있습니다.
선호투표제가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 먼저 우리나라 선거를 생각해봅시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할 때 우리는 투표용지에 있는 후보나 정당 가운데 하나만 고를 수 있죠. 정당별 득표를 집계해 비례대표를 선출할 때는 예외지만, 대부분 선거에서 선거구별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후보가 승리하고, 나머지는 모두 패배하는 단순다수 투표제(plurality voting)가 적용됩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죠. 페일린 후보가 말한 ‘원래 하던 방식’도 바로 이런 단순다수 투표제입니다.
선호투표제에서 유권자들은 가장 좋아하는 후보나 정당에만 투표하는 게 아니라, 투표용지에 있는 모든 후보나 정당을 좋아하는 순서대로 나열합니다. 제일 마음에 드는 후보를 1순위에 꼽는 건 변함없지만, 나머지 후보에 대해서도 선호를 드러내는 거죠. 내가 생각하는 차선, 보통, 차악, 최악의 후보를 모두 표시할 수 있는 겁니다.
선호투표제를 다른 말로 즉시결선투표(instant runoff voting)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표를 집계하는 방식을 보면 이 말이 이해됩니다. 앞서 1순위 투표 결과를 적어둔 알래스카주 하원의원 선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단순다수 투표제였다면, 가장 많은 표를 받은 펠톨라 후보가 곧바로 당선됩니다. 그러나 선호투표제에서는 과반의 득표율을 기록할 때까지 계속 표를 더합니다. 어떤 표를 어떻게 더하느냐? 바로 1순위 표를 가장 적게 받은 후보가 탈락하고, 그 후보를 1순위로 뽑은 유권자들이 2순위로 뽑은 표를 집계하는 겁니다. 베지치 후보를 1순위로 뽑은 28.5%의 표에서 2순위로 누구를 뽑았는지 집계해 펠톨라, 페일린 후보의 표에 더합니다. 그렇게 하면 둘 중 한 명은 과반을 득표하게 되죠. (후보가 4명, 5명일 경우엔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합니다.) 프랑스 대선처럼 별도로 결선 투표일을 정해 투표를 한 번 더 하는 게 아니라 한 번에 투표할 때 선호를 모두 표기한 뒤 이를 곧바로 집계하기 때문에 즉시결선투표라고 부릅니다.
선호투표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유권자들의 선호를 더 자세히, 정확히 반영할 수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습니다. 최하위를 탈락시키고 이들의 표 가운데 2순위, 3순위를 반영, 집계해 유권자 과반의 지지를 받은 후보가 최종 당선되므로, 당선자에게 확실한 정당성이 부여된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또 현재 1등만 당선되는 승자독식 형태의 단순다수 대표제가 거대 양당의 과점 체제를 낳았으며,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이 정치적 양극화 시대에도 군말 없이 뜻을 같이하는 것 중 하나가 단순다수 대표제를 유지하는 거라고 꼬집습니다. 선호투표제를 도입하면 양대 정당이 아닌 제3의 정당, 군소 정당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죠. 기존의 양대 정당 과점 체제에서는 정치 신인의 진입장벽이 높은데,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선호투표제가 이 진입장벽을 낮출 수 있다고 이들은 주장합니다.
한편, 단순다수 대표제에서는 극단적인 성향의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선호투표제에서는 (보통 소수의 열정적인 지지층이 있는) 극단적인 성향의 후보보다 유권자들로부터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 않는 중도 성향의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이론적으로 더 높기도 합니다. 1순위에는 못 들더라도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후보로 뽑히고 싶다면, 당내 경선에서 이른바 ‘모두 까기 싸움닭’이 되는 건 현명하지 않은 전략일 겁니다. 마지막으로 투표를 한 번 하는 건 같기 때문에 별도로 드는 비용이 거의 없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반대 의견도 많습니다. 우선 투표 방식이 복잡하다는 것, 투표 결과 1등이 당선되지 않는 건 직관적이지 않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과연 어떤 투표 방식이 민의를 정확히 반영하는 것이냐를 둘러싸고도 논란이 많습니다. 선호투표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선호투표제를 더 공정한 투표라고 부르는데, 그렇다면 기존의 단순다수 투표제는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제도였을까요? 그렇게 말하기도 분명 어렵습니다. 2순위, 3순위 후보를 지지하는 정도도 유권자마다 다를 텐데, 그 표를 똑같은 한 표로 취급해 더한 다음 억지로 과반을 만든다는 비판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알래스카주 하원 보궐선거 결과는 부재자 투표와 사전 투표가 모두 집계되고 난 뒤 2순위 표를 더해봐야 확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으로선 3위를 차지한 베지치 후보를 1순위로 뽑은 유권자 대부분이 2순위로 같은 공화당 후보인 페일린 후보를 뽑아 즉시결선투표 집계 결과 페일린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설사 페일린 후보가 패배해 선호투표제의 희생양이 되더라도, 그 결과는 선호투표제의 장단점을 논의하는 데 영향을 미쳐선 안 됩니다.
이 원칙은 진보 진영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00년 미국 선거에 선호투표제가 있었다면 어땠을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즉, 2000년 미국 대선에 선호투표제가 있었다면, 논란이 된 플로리다주에서 민주당 앨 고어 후보가 제3 후보인 녹색당 랄프 네이더 후보를 찍은 유권자 대부분으로부터 2순위로 뽑혔을 테고, 그랬다면 간발의 차로 조시 W. 부시 후보에게 내줬던 플로리다주 선거인단을 손쉽게 확보해 대선에서도 이겼을 거라는 가정을 근거로 선호투표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논리적으로 허점투성이 주장이라는 겁니다.
다른 모든 건 그대로 두고 선거 방식만 바꿔보자는 가정 자체가 의미 없는 일입니다. 실제로 2000년 전에 선호투표제가 도입됐다면, 그 과정에서 무수한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을 테고, 그 뒤에 꾸려졌을 정치 지형은 선호투표제를 전국적으로 도입해본 경험이 없는 우리가 절대로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1987년 민주화 직후 치른 정초 선거를 생각해 봅시다. 민주 진영의 양대 기수와 같던 김영삼, 김대중 후보가 분열하는 사이 신군부 세력의 후보인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습니다. 선호투표제가 있었다면 노태우 후보의 어부지리 당선을 막을 수 있었겠죠! 이런 식의 가정은 큰 의미도 없을뿐더러 역사를 차분히 복기하고 이해하는 데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제도는 없습니다. 선거 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현행 선거 제도를 비판하고, 결점을 지적할 순 있지만, 그 비판이 제도가 형성된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문제입니다. 미국에서는 많은 논쟁이 벌어지는 동시에 선호투표제를 적용한 경험과 데이터가 조금씩 쌓이고 있습니다. 경험과 데이터가 쌓일수록 제도의 향방을 정하는 논쟁도 덜 감정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될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답답할 수도 있지만, 제도가 바뀌는 과정은 원래 그렇게 지난한 일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