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사우디 국부 펀드 주최 대안 골프 대회 LIV, 그리고 스포츠워싱
지난 6월, 런던 근교에서 한 골프 대회가 열렸습니다. 리브(LIV)라는 낯선 이름의 대회는 여러모로 반쪽짜리 대회처럼 보였습니다. 참가 선수의 면면을 보면 유명한 선수도 있었지만, 아마추어 선수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특히 미국에선) 골프 채널 어디를 틀어도 이 대회를 볼 수 없었습니다. 같은 시각 우리에게 익숙한 P.G.A.가 주관한 다른 대회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별로 주목할 게 없어 보이는 대회지만, 이 대회에 걸린 총상금은 2천만 달러였습니다. 골프에서 가장 권위가 높은 대회로 꼽히는 마스터스(Masters) 대회의 지난해 총상금이 1,500만 달러였죠. 왜 중계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조그만 대회를 두고 골프 팬과 골프 업계 사람들이 갑론을박을 벌이는지 짐작이 갑니다.
로마자로 숫자를 쓸 때 LIV는 54입니다. 보통 골프 대회는 18홀 한 라운드를 나흘간 돌아 점수를 매기죠. 처음 이틀은 참가한 모든 선수가 라운드를 돌고, 두 라운드 성적이 어느 정도 이상이 되어야만 3, 4라운드를 치를 자격이 주어집니다. 리브 골프 대회는 컷오프 없이 초청받은 모든 선수가 사흘간 총 54홀을 돕니다. 그래서 대회 이름을 리브로 했다고 하는데, 이런 변변찮은 이유보다 리브가 비판 또는 비난받는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바로 엄청난 액수의 상금을 대는 대회의 스폰서가 사우디아라비아 국부 펀드이기 때문입니다.
8개 대회로 첫 시즌을 출범한 리브 골프 대회의 시즌 총상금은 2억 5,500만 달러입니다. P.G.A. 투어보다 상금도 훨씬 많고, 컷오프도 없으며, 심지어 초청받은 선수에게 참가비도 지급합니다. 높은 순위를 기록해야만 상금을 받을 수 있는 P.G.A.와 다른 점 때문에 많은 선수가 리브 골프 대회에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P.G.A.가 사실상 독점적으로 주관해온 골프 세상은 냉혹한 실력주의의 끝판왕과도 같습니다. 프로 골프 선수들은 프로 리그가 있는 다른 종목과 달리 리그에 속한 팀과 계약을 맺지 않습니다. 선수 한 명 한 명이 일종의 개인사업자와 같아서 당연히 선수 노조도 없습니다. 캐디를 포함해 코치진, 스태프를 선수 본인이 꾸려야 합니다. 그 돈이 나오는 가장 중요한 창구가 대회에 걸린 상금입니다.
골프를 잘 쳐서 상금을 많이 벌면 훌륭한 코치진도 꾸리고 여기저기 대회 다닐 때 전세기를 타고 다닐 수 있겠지만, 돈이 없으면 저가 항공의 비좁은 자리에 끼여 타고 간신히 대회를 다녀야 할 수도 있습니다. P.G.A. 투어에 참가하는 남자 골프 선수가 200명쯤 되는데 이 중에 자기가 버는 상금으로 코치진이나 스태프를 무리 없이 운영하고도 돈을 버는, 그러니까 이른바 직업 안정성이 괜찮은 선수는 넓게 봐야 상위 50명 정도뿐입니다. 나머지 150여 명은 대단한 적자는 아니라도 흑자도 내지 못한 채 근근이 대회에 참가하는 편에 속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우디 국부 펀드가 ‘억’ 소리 나는 대안 골프 세상을 만든 겁니다. 대회의 흥행을 위해 유명 골프 선수를 섭외해야 했던 리브 골프는 평소 P.G.A. 투어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던 필 미켈슨과 전 세계랭킹 1위 더스틴 존슨을 비롯해 골프의 레전드라 불리는 선수 몇몇과 계약하는 데 성공합니다. 미켈슨과 존슨은 P.G.A. 투어 통산 상금 랭킹 2, 3위입니다. 1위 타이거 우즈가 지금까지 번 상금이 1억 2,100만 달러, 미켈슨이 9,500만 달러, 존슨이 7,400만 달러인데 미켈슨과 존슨은 리브 골프가 내세울 모델이 되는 것만으로 각각 통산 상금의 2배에 달하는 돈을 받게 됐습니다. 계약금으로 미켈슨이 2억 달러, 존슨이 1억 5천만 달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부자가 자기 돈 써서 대회를 열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오일 머니를 앞세워 스포츠 대회를 열어 인권 탄압을 비롯한 치부를 덮고 이미지를 세탁하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의도에 있습니다. 스포츠와 빨래 또는 세탁을 뜻하는 washing을 합친 “스포츠워싱(Sportswashing)”이란 단어로 기사를 검색하면 관련 기사와 칼럼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스포츠워싱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최근 들어 올림픽, 월드컵 등 굵직굵직한 스포츠 행사를 잇달아 개최한 러시아, 중국은 행사를 통해 대외적인 이미지를 개선하는 건 물론이고, 국내적으로도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했을 겁니다. 프리코노믹스 팟캐스트에 출연해 스포츠워싱에 관해 설명한 홀리크로스 칼리지의 빅터 마테손 교수는 스포츠워싱을 로마시대 황제들이 시민에게 주기적으로 제공해야 했던 ‘빵과 서커스’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굳이 로마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찬탈한 군부 정권이 올림픽을 개최하고, 3S 정책을 편 스포츠워싱의 과거가 우리에게도 있죠.
리브 골프를 가장 앞장서서 비판하는 건 P.G.A.입니다. 자신들이 주관해 온 세상의 판도를 뒤흔드는 ‘더러운 돈’이 곱게 보일 리 없죠. P.G.A.는 리브 대회에 참가하는 골프 선수에게 벌금이나 출전 정지 등 징계를 내리겠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지난주 런던 근교에서 열린 리브 시즌 첫 대회에 출전한 선수 중에는 P.G.A.에서 정식으로 탈퇴한 선수도 있었죠. (P.G.A.가 선수를 퇴출한 건지 선수가 자발적으로 탈퇴한 건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스포츠워싱에 대한 경계심이 커지며 사우디아라비아를 향한 비판, 비난도 많지만, 동시에 P.G.A.가 구축해놓은 기존의 골프 세상에도 문제가 많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P.G.A.는 회원제로 운영되는 비영리, 자선 단체입니다. P.G.A. 투어의 돈은 크게 세 군데로 흘러갑니다. 선수들이 받는 대회 상금, 자선사업, 그리고 행정 비용입니다. 수많은 사항이 비밀리에 이뤄지는 P.G.A.다 보니 회계 장부가 공개된 적이 없지만, 선수들에게 가는 상금이 부족한 P.G.A.가 자선사업에도 생각보다 돈을 많이 쓰지 않고, 행정 비용에 너무 많은 돈을 쓴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리브 골프의 모델이 된 필 미켈슨은 오래전부터 P.G.A.의 상금 지급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해왔고, 자선 단체로 등록한 기관은 예산의 65%를 자선사업에 쓰도록 권고받는데, P.G.A.가 자선사업에 쓰는 돈은 예산의 16%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P.G.A.의 CEO가 받는 연봉은 400만 달러나 됩니다.
리브 골프와 사우디아라비아를 향한 비난은 미국이 그동안 손에 쥔 소프트파워에서의 우위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총성 없는 전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가 나서서 리브 골프를 비판하는 건 아니라도 P.G.A. 투어와 주요 스폰서 기업들, 방송사들, 골프 해설자, 팬들이 일제히 기존 질서를 흔드는 사우디 국부 펀드를 견제하고 비난하는 데 스포츠워싱이란 수사를 동원했죠.
아, 바이든 대통령이 리브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다음 달 직접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할 예정이기는 합니다. 치솟는 기름값 때문에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폭등하자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결정을 좌우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원유 생산을 늘려달라고 부탁하러 가는 것인데, 모하마드 빈 살만(MBS) 왕세자와의 회담에서 어떤 성과를 낼지 지켜봐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