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타계한 생물학자 E.O. 윌슨의 업적에 관해 결이 다른 의견을 살펴보는 글을 한 편 더 소개했습니다. 앞서 소개한 글 “진화생물학자 E.O. 윌슨 타계”와 함께 읽어보시면 상반된 평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92세를 일기로 타계한 하버드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이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인간 본성과 개미에 대해 수준 높은 연구를 수행했고, 이를 일반인들을 위한 책으로 펴냄으로써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회생물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고, 통섭이란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학문 분야 간의 새로운 융합을 이끌었습니다.
1970년대 그가 주장한 사회생물학은 인간의 행동과 문화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당시에는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던 시도를 함으로써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윌슨은 또한, 보통 사람에게는 인생의 막바지라 할 수 있는 80대가 되어서도 왕성한 저술 활동을 했으며, 특히 한때 폐기되었던 집단선택설을 많은 생물학자와의 반목을 무릅쓰고 주장하는 등 자신이 믿는 과학에 충실하기 위해 타인과의 논쟁을 피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타계 이후 그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잇따르는 건 어느 정도 예견된 일입니다. 첫 주자는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실린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대학의 가족보건간호학 부교수인 모니카 R. 멕레모어의 비판입니다. 그는 윌슨이 타계한 지 사흘 뒤 올린 글에서 윌슨의 사회생물학이 양육과 본성이라는 잘못된 이분법을 제시했으며, 인간들 사이의 차이를 유전학과 생물학적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에 바탕한 행동심리학 분야를 낳았다고 평가하며 이는 매우 실망스러웠다고 말했습니다.
사진=위키피디아
또 윌슨의 이러한 관점이 인구 집단 간의 건강과 질병의 분포를 그러한 분포가 만들어진 배경을 무시하고 그저 인종차별적 생각으로 이론을 만든 프랜시스 갈튼, 찰스 다윈, 그레고리 멘델 등으로부터 이어진 것이라 비판했습니다. 멕레모어는 이러한 잘못이 있었던 이유로, 정규분포라는 통계에 기반한 평균적 인간의 존재라는 오개념, 동물에 대한 연구와 인간에 대한 연구가 가지는 차이에 대한 오해, 양육과 본성을 고려할 때 기회의 평등과 같은 외부효과를 고려하지 않은 잘못을 이야기했습니다.
멕레모어의 평가에 과학자들은 곧 반발했습니다. 특히 과학 블로거인 라지브 칸은 이에 대한 반박문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반박문에는 여러 과학자가 서명하며 동참했습니다.
칸은 키에서 지능 및 성격에 이르는 거의 모든 인간의 특성에 대해 개인 간의 차이 중 일부 혹은 상당 부분이 유전자를 통해 설명 가능하다고 말하며, 멕레모어에게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는지 물었습니다. 또한, 정규분포는 어떤 나쁜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출생 체중이나 키, 오이의 길이나 소의 우유 생산량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거의 모든 특성에 대해 나타나는 것이라 반박했습니다. 그의 반박문에는 시카고 대학의 명예교수 제리 코인, SUNY 의 석좌교수 D.S. 윌슨, 하버드의 리처드 랭엄 등 50여 명의 생물학자가 서명했습니다.
2월 16일 과학잡지 언다크는 윌슨에 대한 또 다른 논란거리 한 가지를 소개했습니다. 캐나다의 심리학자인 J. 필립 러쉬톤은 1980년대에 인종 간의 성격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바 있습니다. 그는 당시 자제력의 측면에서 동양인이 가장 뛰어나며 백인, 흑인의 순서라는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이 연구는 통계적 결함과 연구 윤리에 대한 비판을 받았고, 주요 논문들이 철회되었습니다.
문제는 하워드 대학의 진화생물학자인 스테이시 파리나가 남편과 함께 의회 도서관에서 윌슨의 자료를 찾던 중, 러쉬톤의 연구를 지지한 것처럼 보이는 윌슨의 편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윌슨은 대학이 러쉬톤을 학문적 부정행위로 징계하려 했을 때 그를 변호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 편지에서 윌슨은 러쉬톤이 흑인과 다른 인종이 서로 다른 생식 전략을 사용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서로 다른 종 간의 번식 전략 차이를 다룬 부분을 근래에 발표된 인간에 대한 가장 독창적인 연구라 칭찬했습니다. 그는 “이 논문이 발표될 수 있는가가 과학의 객관성에 대한 인간의 용기와 진실성을 검증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편지를 마무리했습니다.
파리나와 그의 동료들은 이 자료에 대한 조사 결과를 1970년대 윌슨의 연구에 반대한 활동가 그룹과 관련 있는 “Science for People Magazine”에 발표했습니다.
이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다양합니다. 2000년, 윌슨과 그 반대자들 사이의 논쟁을 다룬 “진실의 수호자”를 펴낸 사회학자 울리카 세거스트랄은 그 책에서 윌슨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비판한 그 반대자들이 윌슨의 연구를 종종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세거스트랄은 이번 편지가 자신의 평가를 바꾸지 못했다고 언다크에 말했습니다.
생물통계학자 그레고리 메이어는 블로그 “진화가 참인 이유(Why Evolution is True)”에 이번 편지에 대한 평을 썼습니다. 그는 윌슨의 태도가 러쉬톤의 주장 자체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러쉬톤의 학문적 자유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편지에 실망한 이들도 있습니다. 과학교육 블로그를 운영하는 테리 맥글린은 “생물학의 문화적 지형 중 백인의 영역에서 윌슨의 사회생물학은 기본적으로 옳지만, 인종차별적 관점의 영향을 받았고 그도 이를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이번 편지는 윌슨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2014년 뉴욕타임스의 과학기자였던 니콜라스 웨이드는 “문제적 상속(A Troublesome Inheritance)”에서 흑인이 평균적으로 백인이나 동아시아인보다 충동적이고 덜 근면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많은 학자가 이 책을 비난했지만, 윌슨은 이 책이 “두려움 없이 진실을 전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고 평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논쟁이 일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사회가 받아들이는 생각 혹은 기준이 계속 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것들은 분명한 진보이며 개선이고 앞으로 변치 않을 기준으로 자리 잡을 것들인 반면, 또 어떤 것들은 일시적인 시대의 유행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가지는 확신이 오히려 우리의 눈을 가릴 수 있다는 사실과, 어쩌면 그 경계가 본질적으로 모호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윌슨의 예에서라면, 과학의 자유와 생각의 자유, 그리고 인간의 인식 한계에 따른, 집단에 대한 인식이 만드는 그릇된 차별 등이 있습니다.
아, 지난주 우리는 오래된 편지의 발견과 프라이버시의 관계를 이야기한 바 있지요. 이번 주제도 마침 이와 관련이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