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알 켈리 유죄 선고와 흑인 여성의 이중고
미국의 유명 가수 알 켈리(54세)가 30년에 걸친 논란 끝에 마침내 유죄를 선고받았습니다. 그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45명의 증인이 나섰습니다. 피해자 중에는 13세에 불과한 소녀도 있었습니다. 성추행, 강간, 강제 마약 투여, 감금, 총기를 동원한 협박, 낙태 강요까지 증인들이 털어놓은 범죄 내용은 끔찍하고도 중대합니다. 그가 오랜 세월 동안 법망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배경에는 성범죄로부터 취약하고, 피해 사실을 고발해도 사회가 귀 기울여주지 않는 집단, 바로 흑인 여성들의 고통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복스(Vox)는 9월 29일 자 기사에서 알 켈리 판결을 계기로 흑인 여성들이 처한 어려움을 집중 조명했습니다. 미국에서 흑인 여성 4명 중 1명이 18세 이전에 성적 학대를 당하며, 20%가 생애 한 번은 강간을 당하지만, 신고하지 않는 피해자의 수는 신고하는 피해자의 15배에 달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흑인 여성들은 취약한 환경에 놓여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세상을 뒤흔든 미투 운동에서도 흑인 여성 피해자들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과거 알 켈리가 무죄 판결을 받았던 재판에서도 변호인은 피해자들을 돈을 뜯어내려는 거짓말쟁이로 몰았고, 그와 같은 전략은 흑인 여성을 신뢰해주지 않는 사회적 통념에 힘입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2006년에 “미투”라는 슬로건을 처음 사용하며 미투 운동의 창시자로 불리는 흑인 여성 활동가 타라나 버크는 NPR과의 인터뷰에서 “흑인 여성들은 어렸을 때부터 화가 나 있고, 태도가 나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지만, 우리가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들어주려 하지 않는다”며 7세 때 성폭행을 당하고도 자신을 탓하기만 하며, 피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NPR에 실린 대중문화 칼럼에서 필자 아이샤 해리스는 흑인 소녀들의 “빼앗긴 소녀 시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순진무구한 매력을 어필하며 데뷔했다가 성년에 이르고 나서야 기다렸다는 듯이 섹시 컨셉을 밟아간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 동년배 백인 팝스타들에 비해, 알리야는 처음부터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성숙한 이미지로 데뷔해 나이가 훨씬 많은 남성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운 존재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모두 어린 여성 연예인들에게 씌워지는 난감한 굴레라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백인 소녀의 소녀성은 지켜져야 할 것이지만 흑인 소녀에게 소녀성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보호할 것도 없다는 사회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고 필자는 진단합니다.
30년에 걸친 피해자들의 고발과 증언, 다큐멘터리 시리즈(Surviving R. Kelly), 알 켈리의 음악을 소비하지 말자는 #MuteRKelly 운동 등 활동가들의 갖은 노력이 있고 난 후에야 겨우 유죄 판결이 나오기는 했지만, 세상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미투 피로 현상”이라는 이름 아래 피해자들의 고발에 대한 관심은 줄어가고, 알 켈리의 음악은 여전히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인기리에 소비되는 것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같은 피해를 당하고도 더욱 취약한 처지에 내몰리는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과 함께 여러 억압과 차별이 교차하는 지점에 대한 세심한 탐구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