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기후 재앙과 불평등이 빚어낸 환경 인종주의
영화 “기생충”에서 폭우가 내린 밤은 이야기의 절정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지대가 낮고 배수 시설이 열악해 비만 좀 오면 쉽게 침수되는 지역에 사는 주인공의 가족에게 폭우는 일상을 완전히 파괴하는 재난이지만, 언덕 위 고급 주택가 주민들에게 평소보다 조금 많이 내린 비는 미세먼지를 씻어 내려주는, 고맙기까지 한 기상 현상일 뿐이었죠.
문제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더 큰 피해를 본다는 점입니다.
빈부 격차가 인종과 밀접하게 연결된 미국에서는 “환경 인종주의(environmental racism)”라는 개념으로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환경 인종주의라는 말은 1982년 흑인 민권 운동가 벤저민 채비스가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채비스는 유색인종이나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주거 환경에서도 삶의 질과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상황을 지적하고자 했습니다. “환경”에는 독성 폐기물 처리시설이나 쓰레기 매립지 등 건강에 직접적인 해를 끼치는 시설부터, 녹지나 공원의 접근성 등 다양한 요소가 포함됩니다.
뉴욕시에서 인종 다양성이 가장 크고,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사우스 브롱크스의 경우, 공해가 심하고 호흡기 환자가 많아 “천식 골목”으로 불립니다. 브롱크스 주민들이 천식으로 입원할 가능성은 전국 평균보다 5배, 뉴욕시의 다른 지역보다는 무려 21배나 높습니다. 미국 내 독성 폐기물 처리장의 70%가 저소득층이 주로 사는 지역에 몰려있고, 처리장 반경 1마일 안에 사는 주민 200만 명 대부분은 아프리카계나 라틴계라는 통계도 있습니다.
환경 정의 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불러드는 지난 8월 슬레이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우편번호가 그 사람의 건강과 웰빙을 가장 잘 알려줄 수 있는 지표입니다. 구조적인 인종차별로 인해 공해는 유색인종 커뮤니티로 몰리고, 공해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정책마저 이런 구조적인 인종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미국은 여전히 분리된 사회입니다.
이처럼 환경 인종주의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배제되는 것까지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새로 짓는 고속도로의 루트를 정할 때 어떤 경로가 가장 짧고 효율적인지와는 상관없이 부유한 주택가는 멀리 피해 가지만, 빈민촌은 개의치 않고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게 설계해 주민들이 소음과 먼지 피해를 고스란히 입는 식입니다.
경제적인 불평등이 오염과 공해에 노출되는 빈도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해 인식을 높이거나 지역사회에서 캠페인을 조직해 환경 인종주의를 타파하려는 움직임이 꾸준히 일어나고 있지만, 기후변화와 함께 환경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정책도 환경 격차를 줄임과 동시에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우리나라의 기후 변화 정책도 이미 존재하는 환경 격차를 세심하게 반영해야 합니다. “기생충”은 영화로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동시에 기후변화 시대의 환경 격차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시각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