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위기에 처한 아프간 여학생들과 STEM의 역설
2022년 2월 11일  |  By: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  No Comment

집권 첫 해였던 지난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치른 가장 큰 시험은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을 제외하면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을 철수한 일일 겁니다.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포함한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탈환하자, 이슬람 율법을 매우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탈레반이 여성 인권을 극도로 제약하고 탄압할 거라는 우려가 나왔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글은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8월 23일 올린 “스템(STEM)의 역설”에 관한 글입니다.


지난주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고 사실상 정권을 장악하면서 여성 인권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미군이 점령한 지난 20년간, 아프간 여성들은 교육도 받고 직업도 가질 수 있었지만, 이슬람 율법 “샤리아”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탈레반 치하에서는 상황이 급격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탈레반은 “율법의 한도에서”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여성의 사진이 들어간 광고가 지워지는 사진이 소셜미디어에서 퍼져 나가고, 여성들의 직장, 학교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지난 20년간 아프가니스탄의 여권은 빠르게 신장했습니다. 바깥출입도 자유롭지 않던 여성들이 할당제에 따라 상원의 50%, 하원의 27%를 채웠고, 1999년 기준 중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한 명도 없던 것에 비해 대학교 재학생의 3분의 1이 여학생일 정도로 교육도 확대되었습니다. 지난 2017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국제 로봇 경연대회에서 은메달을 수상한 아프간 여학생 팀은 아프가니스탄 변화와 희망의 상징으로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변화와 희망의 상징과도 같았던 이들이 최근 다시 지면에 등장했습니다. 탈레반 점령이 임박하자 팀원 중 일부가 활동 거점이었던 서부 헤라트에서 수도 카불을 거쳐 카타르로 피신했다는 기사가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등 미국 매체에 보도된 것입니다.

아프간 여학생 로봇 연구팀은 4년 전 미국 입국 비자를 두 차례나 거절당하고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준비한 로봇이 압류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냈습니다. 사진=워싱턴포스트 기사 영상 갈무리.

성평등 지수가 낮은 국가에서 이공계 분야의 여성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나는 현상은 “스템(STEM)의 역설”로 불립니다. 스템은 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수학(Math)의 앞글자를 딴 말로, 우리말로 옮기면 이공계를 뜻합니다. 오랫동안 이공계는 남성의 분야로 여겨졌기 때문에, 얼핏 생각하면 선진국일수록 이공계에서 여성 비율이 높을 것 같지만 현실을 전혀 다릅니다.

84개국을 대상으로 한 유네스코의 2005~2008년 자료를 보면, 이공계 여성 비율이 가장 낮은 나라는 네덜란드였고 이란,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등에서 이공계 여성 비율이 높았습니다. 애틀란틱의 2018년 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가운데 여학생이 18%에 불과한 데 반해, 상대적으로 성차별이 심한 알제리에서는 여학생 비율이 무려 41%나 됩니다.

이 현상을 연구한 리즈베켓대학교와 미주리대학교 연구진은 성별에 따른 불평등이 심한 국가의 여성일수록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을 택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연구에서는 남녀 학생들의 적성이 국가별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들어, 여학생들의 선택이 적성과는 큰 관련이 없음을 밝혔죠. 다만 성평등 지수가 높은 국가일수록 복지국가일 가능성도 높아 직업이 없더라도 사회적 안전망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국가에서는 여학생들이 (이를테면 문학이나 미술보다) 직업을 구할 가능성이 큰 이공계 전공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STEM의 역설은 여권이 높아진다고 해서 전통적인 남성 중심 분야나 직업군의 성별 쏠림 현상이 완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견 여성주의의 실패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평등 지수가 높은 국가에서는 여성이 어떤 분야에 관심이나 적성이 없다면 다른 여러 가지 길을 모색할 자유와 여유를 갖게 된다는 점을 연구 결과는 시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임금, 건강, 정치 등 몇 가지 객관적 지표로 한 사회의 성평등 여부를 따지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STEM의 역설은 “여권이 높은 선진국”에서조차 여전히 사회적 인식과 편견 때문에 여학생들이 어려서부터 꾸준히 이공계에서 멀어지도록 교육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어떤 이유로 어떤 전공을 선택했든 고등 교육을 받은 아프간 여학생들이 개인적인 성취와 경제적 자립을 이룸은 물론, 이를 통해 자기 분야와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 나아가 아프간 여권 신장에 큰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한 로봇 연구팀원들은 계속해서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2019년 화상 탐사 콘퍼런스에서 팀원들을 만나 인연을 맺고, 주카타르 미국 대사관 인맥 등을 통해 이들의 탈출을 도운 것으로 알려진 미국 여성 앨리슨 르노가 남은 소녀들의 출국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