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인종차별 해결, 그래도 리버럴리즘이 답입니다
이코노미스트
미국의 인종주의 문제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노예제 폐지 후 150년이 흘렀음에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여전히 마주해야 하는 층층의 불의고, 다른 하나는 우파가 인종 간 분열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행태입니다. 전자의 예가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이라면, 후자는 도널드 트럼프가 재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문화 전쟁에 불을 붙이려 한 일일 것입니다. 오늘날 인종적 정의를 찾기 위한 운동은 이 두 가지 문제를 모두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프레드릭 더글러스와 마틴 루터 킹 같은 지도자들은 기회의 평등, 법 앞의 평등이라는 비전을 실현하고 인식을 바꿔 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주장을 펼쳤습니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던 시위대를 포함해 대부분의 미국인은 이처럼 전통적인 리버럴의 이상에 동의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항하는 위험한 접근법이 미국 대학가를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리버럴/진보의 가치를 부정하고, 모든 사람을 인종으로, 모든 행동을 인종차별적인 것과 반인종차별적인 것으로 구분합니다. 아직 지배적인 움직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한 역동성을 띠고 대학가에서 일상생활 속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리버럴의 가치를 대체하게 된다면 공개적인 토론은 위협을 받게 될 것이고 흑백을 막론하고 약자들 간에 분열의 씨앗을 뿌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의 바탕을 이루는 전제는 맞는 말입니다. 인종 간 불평등이 충격적일 정도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죠. 인종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었음에도 흑인들의 삶이 나아지는 속도는 여전히 너무 느립니다. 2001년에 태어난 흑인 남성의 3분의 1이 살면서 한 번은 감옥에 갈 텐데, 같은 해 태어난 백인 남성 중 감옥에 갈 사람은 17명 중 1명에 불과하죠. 흑백 간 소득과 자산의 격차도 1968년부터 변함이 없습니다.
이 사상은 또한 몇 가지 가치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불공평한 제도와 관행이 인종주의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이나, 경찰 폭력과 같이 명백하지는 않더라도 미묘하고 자잘한 불평등이 삶의 구석구석에 존재한다는 것 등이죠.
하지만 문제가 발생하는 건 여기서부터입니다. 이 사상을 힘과 위협으로 주입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설득이나 투표가 아닌, 상대방의 입을 막는 방식, 내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 반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특권을 누리고 있거나 자신의 인종을 배신했다고 여겨지는 자들을 배척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 세계관에서는 모든 이의 모든 행동, 누가 글을 써내고, 누가 취업을 하고, 누가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는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이데올로기의 프리즘을 통해서 해석됩니다.
이런 움직임이 그저 과열된 대학 캠퍼스의 극단주의라고 치부하면 마음이 편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아직은 주요 정당을 장악한 움직임이라고도 볼 수 없고요. 사람들이 백인의 특권을 없애자고 말할 때, 대부분은 통합, 정의와 같은 긍정적인 것들을 마음에 품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관념은 중요한 것이고, 대학가의 용어들이 언론과 기업으로 펴져 나가면 이데올로그들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이들의 접근법은 이미 피해 사례를 낳고 있습니다. 대학의 연구 주제들이 바뀌고, 공개적인 망신 주기와 위협 때문에 토론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점은 이런 사상이 미국의 인종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자유롭게 분석하고 정설을 의심할 수 없다면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 없이 누군가나 어떤 관행을 비판할 수 없다면 효과적인 정책을 만들어내고 다듬을 수 없습니다.
이 새로운 사상이 진보를 방해하는 방식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인종 간 평등을 막는 장벽은 그 과정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노출해야만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어디에든 스며있는 인종주의가 영원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앞길을 막을 거라는 잘못된 관념은 그 자체로 장벽이 될 것입니다.
또한 권력과 분열에 집중하는 사상은 분열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우파 일부 세력에게 더 큰 힘을 실어주게 됩니다. 설득보다는 힘을 믿다 보면 연대를 구축하기 어려워지죠. 필수적인 동맹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강요로 끌려오게 됩니다. 가정과 일터, 학교에서 모든 상호 작용을 인종 간 권력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면, 서로 다른 인종 간 교류 가운데 책잡히지 않을 행위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틀렸고, 위험할 뿐 아니라 불필요하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리버럴리즘이 개혁으로 가는 보다 공정하고 효과적인 길을 제공합니다. 리버럴리즘이 이미 피부색과 관계없이 법적, 시민적, 도덕적 평등과 개인의 존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장과 토론을 통해 진보를 이루고, 이성과 공감을 통해 편견과 거짓을 몰아내자는 것이 리버럴의 신념입니다.
리버럴리즘은 사상의 자유 시장에서 번성하므로 다양성은 필수입니다. 새로운 목소리와 실험이 토론을 풍요롭게 만들죠. 힘으로 힘에 맞서자는 것이 아니라, 팩트와 증거를 가지고 논쟁하여 약자가 강자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리버럴리즘입니다.
리버럴리즘은 진보를 중시합니다. 진보에는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는 것도 포함되죠. 특히 인종 문제에 대해서는 과거의 업보가 큽니다. 노예제와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된 역사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것이 리버럴리즘이 영향력을 발휘한 지난 250년 간 인류가 엄청난 물질적, 과학적, 정치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인종 간 불평등의 해소에도 진전이 있었습니다. 남아공에서는 리버럴이 노조, 공산주의자와 손잡고 아파르트헤이트를 무너뜨렸죠.
리버럴은 미국의 문제 해결에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흑백 간 경제적 격차는 기회의 평등을 도모하는 경제정책을 통해 상당 부분 좁힐 수 있습니다. 정체성에 기반한 주(州)나, 현실적인 어려움과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일시 배상금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피부색이 아닌 빈곤을 기준으로 한 지원 정책도 얼마든지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미국이 분열되지 않고 통합될 수 있습니다. 변화를 원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면, 이런 정책들은 충분히 정치적으로 팔릴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통합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코노미스트는 기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제시한 바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정책 중 하나는 인종 간 빈부격차의 핵심인 주거 분리를 해소하는 것입니다. 토지이용법 개혁과 임대료 지원 바우처 도입이 급선무고, 실현되면 공공 서비스 개선과 폭력 범죄 예방, 교육 평등에 큰 진전이 있을 것입니다. 상담이나 소액의 현금 지원으로도 대학 졸업률을 크게 높일 수 있습니다. 세제도 개선되어야 합니다. 근로소득공제와 아동 수당, 출생 시 정부가 개설해주는 신탁 계좌(Baby bond)가 빈부 격차 개선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리버럴들이 현 상황에 도전해 사회 변화를 이루어낸 역사가 존재합니다. 아동 노동의 근절과 여성의 정치 참여가 이에 해당합니다. 지금 미국에 그런 변화가 필요하다면, 미국 사회는 정체성 정치에 기댈 일이 아닙니다. 불관용과 위협, 분열 대신 리버럴리즘에 힘을 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