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지연 전략’ 택한 영국 정부의 설명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를 세계적 대유행 팬데믹(pandemic)으로 선언한 뒤 각국 정부와 보건·방역 당국은 잇따라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영국 정부는 선별적 지역 봉쇄나 공격적인 검사 및 환자 격리 대신 인구 전체에 집단 면역(herd immunity)을 키워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지연 전략’을 채택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팬데믹의 대책으로는 너무 약하다는 지적,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에 전혀 대비가 안 된 의료 체계에 대한 비판, 지연 전략이라는 말 자체가 앞뒤가 안 맞는 궤변이라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영국의 제레미 헌트 전 보건장관마저 긴급 휴교령을 비롯해 더 취할 수 있는 조처를 하지 않은 점이 우려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영국 정부의 최고과학보좌관인 패트릭 발란스 경이 정부가 이런 결정을 내린 근거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BBC의 라디오4 채널 투데이(Today) 프로그램에 출연한 발란스 경은 환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지연하고, 그 사이 인구 전체에서 면역이 생기는 시간을 버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국민이 한꺼번에 코로나19에 감염돼 병원을 찾으면 영국의 의료 시스템이 이를 다 수용할 수 없습니다. 이미 영국으로도 바이러스가 들어온 이상 바이러스는 퍼질 것이고, 환자는 계속해서 나올 겁니다.
중요한 것은 환자 수가 급증하지 않도록 그래프를 그렸을 때 그 최고점을 낮추고 더 완만하게 퍼진 그래프가 되도록 하는 겁니다. 또한, 기저 질환이 없는 건강한 사람들은 대부분 코로나19에 감염되더라도 가벼운 감기 같은 증상만 보이고 회복할 겁니다. 이 과정에서 집단 면역이 생성될 수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퍼지는 걸 막는 동시에 기저 질환이 있는 사람과 노약자 등 고위험군을 집중적으로 관리하고, 집단 면역을 키워가는 것이 정책의 기본적인 방향입니다. 아마도 코로나19는 매년 유행하는 계절 독감처럼 앞으로 날이 추워지면 다시 생길 것으로 보입니다.”
아일랜드와 프랑스 정부가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지만, 영국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의 존 애시워스 보건장관은 앞서 맷 행콕 보건장관에게 정부 내 정책 결정에 행동과학을 기반으로 한 조언을 하라고 만든 넛지팀(nudge unit)의 조언을 토대로 내린 결정이 정말 맞느냐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발란스 경은 이에 대해 역학자의 관점에서 방역에 필요한 대책을 세운다는 원칙에 따라 내린 결정이라며,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지나치게 통제하고 제한하는 데 따르는 역효과도 고려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무언가를 너무 지나치게 억누르는 조치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그런 조치를 해제하면 상황은 다시 원래대로 나빠질 수 있는데, 그 시점이 오히려 더 안 좋을 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바이러스에 맞설 때 백신만큼 중요한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면역력인데, 지금 바이러스가 퍼지는 걸 막는 데 온힘을 기울여 오히려 면역이 생성되는 걸 저해하면, 올해 말 겨울에 다시 감염병이 유행하면 영국 의료 체계는 이를 버텨내지 못할 겁니다.”
보리스 존슨 총리는 12일 기침을 하거나 열이 나는 등 코로나19 의심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라도 우선 증세가 심각하지 않다면 병원을 찾지 말고 7일 동안 집에서 스스로 격리하라고 당부했습니다. 또 학교에서 다른 나라로 단체 여행을 가지 못하게 했고, 70세 이상의 기저 질환이 있는 고위험군은 크루즈 여행을 해선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헌트 전 장관은 그러나 휴교령도 내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모이는 행사를 더 엄격히 강제로 취소하지 않은 점이 걱정된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많은 나라의 보건 당국이 잇따라 강력한 조치를 취한 데 반해 영국의 조치는 너무 느슨해 보인다고 헌트 전 장관은 지적했습니다. 정부의 안일한 대처는 더 많은 사람이 코로나19에 걸리게 할 뿐이라는 겁니다.
“지금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한, 정말 중요한 순간입니다. 많은 사람이 휴교령도 내리지 않고, 대규모 행사를 선제적으로 취소하지 않은 정부 결정에 우려하고 있습니다.”
영국 프로축구 구단 감독과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면서 영국 축구협회는 리그를 오는 4월 3일까지 중단했습니다. 그러나 럭비를 비롯한 일부 스포츠 경기는 아직 취소되지 않고 있습니다. 헌트 전 장관은 건강한 사람들이 축구장이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 코로나19에 감염되는 것보다 그 사람들이 이후에 큰 제약 없이 일상생활을 하면 바이러스를 퍼뜨릴 수 있다는 점이 제일 큰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놀라울 만큼 위험한 결정을 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영국은 이탈리아의 4주 전 상황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어요. 이탈리아처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 말라는 법이 없는데, 너무 안일하게 대처하고 있는 겁니다. 4주 동안 코로나바이러스의 전파를 막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하는 게 맞습니다.”
런던 위생열대의학대학원에서 국제공중보건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지미 윗워스 교수도 정부가 더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 놀랐다면서도, 상황이 악화하면 머지않아 영국 정부도 주변 국가들을 따라갈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습니다.
“영국 국민들이 이해하고 지지할 수 있는 방안을 채택해 도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이웃 나라들이 어떻게 했는지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이미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 취할 때가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그러지 않은 점이 의아하지만, 앞으로 1~2주 안에 더 강력한 조치가 나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가디언, Heather Stewart / Mattha Bus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