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2차대전 발발 80주년에 또 드러난 트럼프 대통령의 ‘무지’
트럼프 대통령이 다른 나라에 관해 엉뚱하거나 부적절한 발언을 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입에서 국제 정세에 대한 깊은 조예를 바탕으로 한 통찰력 있는 발언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렇더라도 기본적으로 지금 말하고 있는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참모들에게 브리핑조차 듣지 않고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그냥 내뱉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실언이 도를 넘으면 지난 주말처럼 문제가 됩니다.
지난 2일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한 지 8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원래는 트럼프 대통령이 폴란드로 직접 날아가 기념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허리케인 도리안이 바하마를 거쳐 미국 남동부에 상륙할 예정이 되자 트럼프 대통령은 계획을 바꿔 비상 상황을 지휘하기 위해 미국에 남았습니다. 대신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기념식에 참석하러 폴란드로 갔죠.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물론 그래놓고 미국에 남아 골프를 치러 간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비난의 목소리가 없던 건 아니지만, 그건 논외로 하겠습니다.
문제의 설화는 주말을 보내러 가는 길에 기자들과 잠시 나눈 대화 중에 터져나왔습니다. 폴란드에서 열리는 기념식에 직접 참석하지 못하는 대신 남길 말이 있는지 묻는 기자의 말에 트럼프 대통령은 폴란드 국민들을 향해 뜬금없이 ‘축하한다’고 말했습니다.
기자: 대통령님, 오늘이 세계 2차대전 발발 80주년인데요, 폴란드에서 기념식이 열리는 거 알고 계시죠. 따로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트럼프: 폴란드에 전할 엄청난 메시지가 있어요. 제가 직접 가진 못하지만,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곧 폴란드에 도착할 겁니다. 저를 대신해서 기념식에 참석하는 거예요. 저도 조만간 폴란드에 꼭 가고 싶습니다. 그보다도 폴란드 국민들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폴란드는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 많은 훌륭한 나라잖아요. 미국에도 폴란드 사람들이 많이 살아요. 한 800만 명쯤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폴란드 친구들 다 좋은 사람들이죠. 어쨌든 저도 폴란드에 곧 가볼 겁니다.
1939년 9월 2일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습니다. 이틀 뒤인 4일 프랑스와 영국에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유럽과 전 세계에서 다시 끔찍한 전쟁이 시작됐죠. 세계 2차대전을 거치며 폴란드 인구는 무려 20%나 줄었습니다. 이렇게 끔찍한 날에 관해 할 말을 물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마치 승리를 축하하는 듯한 인사를 남긴 겁니다. 같은 날 독일의 (외교 분야를 주로 담당하는) 대통령은 폴란드 국민들을 향해 용서를 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다행히도 트럼프 대통령을 대신해 폴란드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한 펜스 부통령은 엄숙한 톤으로 (제대로) 준비한 발언을 읽어내려갔습니다.
제가 서 있는 이 곳에서 80년 전 오늘 시작된 끔찍한 전쟁의 참상은 사실 폴란드 국민이 아니라면 온전히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 2차대전 발발 말고 또 다른 질문에도 엉뚱한 답을 내놓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역사와 외교에 얼마나 관심이 없고 무지한 대통령인지 여과없이 보여준 장면이었습니다.
3년 전에 콜롬비아 정부와 평화협상을 체결한 콜롬비아 좌파 무장반군 FARC의 지도부 가운데 일부가 최근 협상을 파기하고 다시 무장 투쟁에 나서겠다고 선포한 데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반세기 넘게 이어진 최장 기간 내전이 다시 벌어질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FARC라는 단체 이름부터 처음 들어본 듯했습니다. 그러고는 예의 트럼프 다운 ‘뻔한 찬사’로 답변을 서둘러 마무리했습니다.
기자: 대통령님, 콜롬비아 상황에 관해 질문 드리겠습니다. FARC 전 지도부가 다시 무기를 들겠다고 선언한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트럼프: 지금 콜롬비아라고 했어요?
기자: 네, 콜롬비아요. FARC 전 지도자가 공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트럼프: 그러니까 남미에 있는 나라 콜롬비아 말이죠?
기자: 네, 콜롬비아 맞습니다. 그러니까…
트럼프: 아, 물론이죠. 콜롬비아와 관계는 지금 더없이 좋습니다. 콜롬비아도 뭐 잘 하고 있어요. 아시죠? 문제가 있다면 이웃 나라 베네수엘라에서 난민이 몰려와서 문제이긴 한데, 어쨌든 콜롬비아랑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까 별 문제 없을 겁니다.
FARC를 이끌었으며, 3년 전 평화 협정에 직접 서명했던 이반 마르케스가 협상 파기를 선언한 동영상을 공개한 것이 목요일 오전이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눈 시각은 금요일 저녁 6시 무렵이었죠. 하루하고도 한나절이라는 시간 동안 미국 대통령이 이 정도 사안을 브리핑받지 못했을 거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트럼프 대통령의 반응과 발언을 보면 FARC에 관해 처음 듣는 사람 같았습니다. 백악관 참모들이 브리핑을 안 했거나, 대통령이 브리핑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것 둘 중에 하나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이런 모습을 일관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시급한 현안이 벌어지는 사안에 관한 질문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한가하기 짝이 없는 답변을 내놓곤 했습니다. 현안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한 동문서답이 트레이드마크가 됐습니다. 늘 내놓는 답변의 패턴도 이미 나와 있습니다. 먼저 언급된 나라에 축하 인사를 건넵니다. (현안이 슬픈 일이거나 위기 상황이라도 상관 없습니다) 그리고는 그 나라가 무조건 잘 하고 있다고 추켜세우면서 현안과 관계 없이 자기가 관심 있는 그 나라와 관련된 일을 언급합니다. FARC에 대해 물었는데, 베네수엘라 국가 위기 사태로 난민이 몰려오고 있다고 답한 것처럼 말이죠.
트럼프 대통령이 기억할지 모르지만, 사실 FARC는 트럼프 대통령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됐습니다. 공개석상에서 나온 말들이라 모두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먼저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백악관으로 콜롬비아의 후안 마누엘 산토스 전 대통령을 초청했습니다. FARC와 평화 협정을 타결하고 그 공로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산토스 전 대통령에게 트럼프 대통령은 두루뭉술하기는 했지만, 축하 인사를 건넸습니다.
FARC가 정말 오랫동안 계속된 난제이자 골칫거리였죠. 그렇지만 산토스 대통령이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습니다. 쉬운 일이 절대 아녜요. 엄청나군요.
2018년 UN 총회에서는 새로 선출된 이반 두케 대통령과 회담한 뒤 좀 더 어려운 질문을 받았습니다. FARC와 함께 더 급진적인 좌파 무장단체로 평화협정에 참여하지 않은 ELN(국민해방군)의 관계에 관한 의견을 묻는 내용이었죠. 이번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두루뭉술하게 답하고 넘어가려 했고, 결국 두케 대통령이 대신 답을 했습니다.
기자: FARC와 ELN을 포함해 콜롬비아의 평화를 공고히 하는 방안에 관해서도 두 정상이 이야기를 나누실 예정입니까?
트럼프: 저한테 물으신 건가요? 물론이죠. 우리는 모든 의제에 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눌 거예요.
두케: 제가 한 말씀 드리자면…
트럼프: 다 얘기할 거라고요.
두케: (트럼프에게) 대통령님, 제가 대신 답해도 될까요?
트럼프: 그러세요.
두케: 반군을 자처하는 이들에게 전할 중대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ELN는 무고한 콜롬비아 시민을 사살한 테러 단체일 뿐입니다. ELN은 지난 정권과 협상에 임하는 17개월 동안 납치를 비롯한 범죄를 계속해서 저질러 왔습니다. 이미 저는 ELN에 범죄 행위를 당장 중단하고 납치한 인사들을 석방하라고 촉구한 바 있습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콜롬비아 정부는 ELN과 어떤 협상도 하지 않을 겁니다.
트럼프는 산토스, 두케 두 대통령만 만난 것이 아닙니다. 2017년에 전직 대통령 두 명을 자신의 별장 마라라고로 초대해 비공개로 만났습니다. 공교롭게도 초대받은 두 전직 대통령 모두 산토스 대통령이 주도하던 FARC와의 평화협정을 강력히 비판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어쨌든 트럼프 대통령이 FARC를 모를 리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공개석상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한 말을 종합해봐도 그가 FARC와 관련한 기본적인 사실관계라도 알고 있는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워싱턴포스트, Aaron Bla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