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과 거짓말쟁이들 사이의 술래잡기
* 칼럼을 쓴 데렉 머피는 마라톤에서 속임수를 쓰는 사람들을 적발해 퇴출하는 캠페인 사이트 marathoninvestigation.com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지 시각으로 오늘(15일) 미국 보스톤에서는 유서 깊은 보스톤 마라톤이 열립니다.
6년 전 일어난 테러 공격을 제외하면 보스톤 마라톤과 관련해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사건’은 아마도 1980년에 일어난 로지 루이즈(Rosie Ruiz)의 뻔뻔한 거짓말일 겁니다. 당시 루이즈는 레이스의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린 뒤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결승선을 1km도 남겨두지 않은 지점에서 몰래 마라톤 코스에 끼어들어 유유히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2시간 31분 56초의 기록은 참가한 여자 마라토너 가운데 가장 빠른 기록이었죠. 혜성처럼 등장한 무명 마라토너는 땀도 별로 흘리지 않은 태연자약한 얼굴로 방송사와 인터뷰까지 했습니다. (PBS의 로지 루이즈 관련 다큐멘터리 영상)
땀을 너무 안 흘리는 것 말고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너무 많았습니다. 5km마다 있는 체크포인트에 남은 기록이 하나도 없었고, 레이스 이모저모를 담은 수많은 사진 속에서 루이즈의 사진은 한 장도 찾을 수 없었죠. 결국, 루이즈가 결승선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새치기해서 레이스를 완주한 척 모두를 속였다는 증언이 잇따라 나왔고, 대회가 끝난 뒤 여드레 후 주최 측은 루이즈의 기록을 취소하고 그를 마라톤계에서 제명했습니다.
가히 희대의 사기극이라 불릴 만한 일이 일어났지만, 경각심을 가진 건 원래 정직한 사람들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루이즈 사태’ 이후 마라톤 대회를 주관하는 조직위원회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갖은 속임수를 적발하고 퇴출하고자 노력해왔지만, 여전히 속임수와 거짓말은 근절되지 않았습니다.
4년 전 마이크 로시(Mike Rossi)라는 이름의 마라토너가 인터넷에서 유명 인사가 됐습니다. 그는 자신이 보스톤 마라톤에 참가하는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주고 싶다며, 가족이 유명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것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건 교육적으로도 가치 있는 일인 만큼 아이들이 학교를 안 가도 결석으로 처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 인터넷에서 많은 지지와 응원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기록뿐 아니라 아이들의 교육까지 생각하는 ‘의식 있는 아빠 마라토너’ 반열에 오른 로시에 관해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며 이것저것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의 마라톤 기록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보스톤 마라톤을 비롯해 유명한 대회에는 풀코스 마라톤에 참가하려면 최근 얼마간 정해진 시간 내에 풀코스를 완주한 공인 기록을 제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로시는 펜실베니아주 리하이 밸리에서 열린 비아 마라톤이라는 대회에서만 난데없이 훌륭한 기록을 세워 보스톤 마라톤 참가 자격을 얻었을 뿐 평소 실력으론 42.195km를 완주할 만한 마라토너가 아니었습니다. 유난히 그 대회에서만 갑자기 빼어난 실력을 발휘했다기에는 대회 주최 측이 찍은 수많은 사진 가운데 로시의 모습은 출발선과 결승선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는 점 등 석연찮은 구석이 너무 많았죠. 로시 본인은 끝내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가 42.195km를 정직하게 달리지 않고 속임수를 썼다는 의혹을 해소하지도 못했습니다.
당시 저는 풀코스 마라톤을 총 10차례 완주한 상태였습니다. (기록은 보스톤 마라톤에 신청할 수준에 한참 못 미쳤죠.) 로시 같은 사례를 자꾸 접하다 보니 과연 이런 식으로 속임수를 쓰는 사람들이 마라토너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지, 정말 마라톤계도 문제가 심각한 건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로시처럼 갑자기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준으로 기록을 단축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찾아봤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더니 축지법 같은 초능력을 가지게 된 게 아닌 이상 몰래 지름길로 가로질렀거나 어떤 식으로든 속임수를 썼다고밖에 할 수 없는 사례들을 모아본 거죠. 사례를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생각보다 거짓말쟁이들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아예 marathoninvestigation.com이라는 웹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데, 웹사이트에서 다룰 소재가 없어 걱정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1980년 루이즈 사태를 겪고 난 뒤 마라톤 대회를 주최하는 조직위원회는 속임수를 막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동원하고 대책을 세웠습니다. 대회 참가자들이 달리는 내내 착용해야 하는 종이 번호판에 전자칩을 부착해 구간별로 정해진 지점을 통과할 때마다 자동으로 구간 기록이 저장되도록 했습니다. 전문 사진사들이 대회 장면을 찍은 사진들을 이른바 시간대별로 정해진 코스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는 증거로 쓰기도 합니다. 최종 기록뿐 아니라 공식 대회 웹사이트에서 구간별 기록도 공개해뒀기 때문에 중간에 숨어 있다가 코스에 끼어드는 루이즈 같은 속임수는 사실상 무력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다른 속임수가 새로 등장합니다.
신종 거짓말쟁이들이 노리는 대회는 보스톤 마라톤 같은 대회에서 뛰기 위해 공인 기록을 인정받아야 하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대회들입니다. 이런 대회들은 원활한 대회 운영을 위해 참가자의 숫자를 제한하는데, 제때 신청하지 못한 이들 가운데 대회에 참가하고 싶은 이들과 미리 참가 신청을 했지만 뛸 수 없게 된 이들이 대회 참가권을 직접 거래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를 악용해 이른바 “이름표 바꿔치기(bib muling)”라 불리는 속임수를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올해 보스톤 마라톤에 3시간 28분 25초라는 훌륭한 완주 기록을 내고 참가가 확정됐던 한 60세 남성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이 남성은 지난해 미네소타주 덜루스에서 열린 할머니 마라톤을 위와 같은 훌륭한 기록으로 완주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남성은 대회에 참가할 수 없게 됐다며 자기 이름표를 온라인에서 팔았던 겁니다. 그 이름표를 산 사람은 달리기 선수 뺨치는 실력의 20대 여성이었는데, 이 사람은 자기 기록이 60세 남성의 기록으로 둔갑해 보스톤 마라톤 조직위원회에 제출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신원을 조작해 가짜 기록을 제출한 사실이 적발된 뒤 남성은 할머니 마라톤 대회에서 영구 제명됐습니다. 보스톤 마라톤 출전도 당연히 무산됐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웹사이트에는 이름표 바꿔치기로 의심된다는 제보가 꾸준히 들어옵니다. 남들을 속여 마라톤 대회에 나가려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도 알고 보면 꽤 다양합니다. 순전히 권위 있는 대회에 나가보고 싶은 경우도 있지만, 마라톤 대회를 빌미로 다른 도시를 여행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회에 참가하면 받을 수 있는 기념품 때문에 그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셜미디어에 이 사실을 올리고 주목받고 싶은 욕심에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작 뛰지도 않고 받게 된 메달을 가지고 그럴듯한 사진을 찍어 올리고 “그 나이에 열정도 대단하셔라!” 같은 찬사를 받고 싶은 거죠. 소셜미디어는 제 웹사이트에 들어오는 제보의 가장 흔한 근거이기도 합니다. 원래 이 정도로 잘 뛰던 사람이 전혀 아니었는데, 평소 운동하던 걸 고려하면 42.195km를 완주하기 어려워 보이는 사람인데 갑자기 유명한 대회에 나가니 의심스럽다는 내용의 제보들이 오곤 합니다.
이쯤 되면 수많은 마라톤 대회들이 온갖 속임수로 얼룩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제가 볼 땐 상황이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이름표를 바꿔치는 등 거짓말로 남을 속이려는 사건이 벌어지면 그 때마다 뉴스가 되어 가십으로 소비되다 보니 거짓말이 만연한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 거짓말쟁이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한편 이 정도 거짓말은 사회에 심각한 해악을 끼치는 것도 아닌데, 루이즈처럼 챔피언의 자리를 찬탈하려 드는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눈 감아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동정 여론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스포츠는 규정을 지킬 때만 의미가 있고 가치가 빛나는 법입니다. 대회 순위를 뒤바꿀 만한 대형 사기가 아니라도, 정직한 땀을 흘려가며 기록을 몇 초 더 줄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거짓말에는 단호히 철퇴를 가해야 합니다.
(워싱턴포스트, Derek Mur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