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살츠 특집 3] 11,000 명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이 그림을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는 옳지 않다.
(올해 퓰리처 상 비평부문을 수상한 제리 살츠의 비평문 몇 개를 소개합니다.)
19세기 프랑스 화가인 발더스의 한 작품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전시해서는 안된다는 청원에 서명한 이들의 수가 11,000 명을 넘어섰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이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고 있다. 옳은 판단이다.
1938년 그려진 “꿈꾸는 테레사(Thérèse Dreaming)”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실제로 불쾌한 느낌을 준다. 이 그림은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한 쪽 발을 의자 위에 올려 속옷이 보이는 소녀를 그린 작품이다. 발 아래 고양이는 우유를 마시고 있다. 어떤 이들은 속옷의 주름이 성기를 연상시킨다고 주장한다. 다른 이는 이런 작품은 절대로 만들어져서는 안되는, 성적으로 불쾌한 작품이라 말한다. 청원서에는 “성추행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 이런 종류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관음증과 아동의 대상화를 정당화한다는 인식을 줄 수 있다”고 쓰여 있다. 청원서를 쓴 미아 메릴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 작품이 동시대 다른 여성 작가의 작품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발더스의 작품이 문제가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한 쪽 가슴이 드러난 성인 여성이 성기가 드러난 어린 소녀의 머리와 한 쪽 다리를 들고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 “기타 레슨(The Guitar Lesson)”이라는 작품은 처음 그려진 1934년 파리 삐에르 갤러리에서 단 15일 동안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공개되었다. 이후 70년대 뉴욕 57번 가의 피에르 마티스 갤러리에서 한 달 동안 전시된 것이 유일하다.
물론 발더스만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 모딜리아니의 누드 작품들 역시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의 단독 전시회는 그가 여성의 음모를 그렸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었다. 은둔자 헨리 다거는 수많은 소년 소녀의 누드가 담긴 “비비언 걸즈(Vivian Girls)”라는 작품을 남겼다. 항문, 가슴, 눈, 입, 성기, 얼굴이 모두 하나의 평면에 그려지는 피카소의 그림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발더스의 “꿈꾸는 테라사”는 좀 더 미묘하다. 이 그림은 우리를 진부함, 천진난만함, 이제 피어나기 시작하는 성징, 금기, 움찔함, 일상적 느낌 이상의 어떤 감상을 하게 만든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실제로 젊은 여성을 성적으로 대하는 시대이며, 이 그림을 그린 것도 남성이다. 이 그림이 실제로 남성을 흥분시키는 그림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수많은 이미지들 역시 마찬가지며, 사실 그 이미지들 상당수는 너무나 정형화 되어 있어 심지어 보는 이를 지루하게 만든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채플에 남긴 구체적인 성적 묘사는 수백 년 동안 다수의 덧칠을 통해 숨겨졌다. 카라바지오가 그린 나체 청년 큐피드는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쾌락의 세계로 초청한다. 베르니니는 강간과 여성의 자위를 묘사한 작품을 남겼다. 드가는 무방비 상태의, 두 다리 사이가 구도의 중심이 되는 발레리나 소녀들을 그렸다. 매춘굴의 어린 소녀들을 그린 초상화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그림인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은 몸매를 자랑하는 다섯 명의 발가벗은 여인들이다.
이 모든 작품들이 남성에 의해 그려진 것은 사실이다. 지난 세기까지 사실상 예술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남성이었고, 그런 면에서 특권적이고, 성차별적이고, 일방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예술 작품에 대한 비난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특정한 작품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예술이 가진 본질적인 특성이다. 사실 어떤 그림이나 말, 아이디어에 대해 불만, 의혹, 공포, 반감, 심하게는 혐오를 가지는 것은 예술의 역사만큼 오래된 일이다. 보티첼리의 그림들은 너무 쾌락적이라는 이유로 1497년 사보나롤라의 화형식에서 재로 바뀌기도 했다. 인류의 역사에서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파괴된 누드 동상의 수는 셀 수도 없다. 4세기 이후 서구의 중심 사상이 된 기독교는 성적인 문제에 특히 민감했다. (물론, 이런 억압이 항상 자유를 추구하는 이들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억압이었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랩 음악, 로큰롤, 제임스 조이스, D.H. 로렌스, 헨리 밀러, 안드레스 세라노, 그리고 크리스 오필리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비난을 생각해보라.)
발더스는 까다로운 예술가이다. 특히 오늘날 바뀐 세상에서 그 문제는 더 심각하다. 나는 이런 말로도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때 나는 발더스에 대해 “불쾌하고, 위선적이며, 틀에 박혀 있다”고 쓴 적도 있다. 그의 초현실주의는 사도마조히즘과 에로티카와 연결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가 근대 미술에서 추상화가 아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성장기의 강렬한 욕구와 분노, 좌절과 구속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꿈꾸는 테레사”의 가치는 수많은 이들이 각각의 맥락에서 서로 다른 감상을 할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분위기’와 무관하게 그 감상에 정답은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훌륭한 예술 작품처럼, “꿈꾸는 테레사” 또한 여러 차원의 모순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우리가 순수함을 보호하고, 불쾌한 생각을 제한하며,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게 되더라도 예술은 절대 이런 모순을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보는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포르노그라피와 달리, 발더스는 이 그림이 정말 성기에 관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우리를 분명 유혹하지만, 유혹이 이 그림의 전부는 아니며 거기에 모순이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발더스의 작품을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준다는 이유로 미술관에서 없앤다면, 우리는 메트로폴리탄에 걸려있는 작품의 대부분을 결국은 없애게 될 것이다. 인도, 그리스, 로마, 아프리카의 작품들 중에는 수간, 난교, 적나라한 나체, 성교 등을 묘사한 작품들이 상당하다. 오세아니아의 작품 대다수는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과장해 묘사한다. 일본의 작품들은 노골적으로 금기를 건드린다. 로코코 미술 중 다수가 자위, 노출증, 관음증, 개와 함께한 소녀, 연령대를 초월한 밀회 등을 묘사한다. 티치아노의 역작인 “우르비노의 비너스(1934)”는 야한 눈길로 관객을 쳐다보며 한 손으로 자신의 음부를 만지는 나체의 젊은 여성을 그린 작품이다. 고야는 음모가 포함된 여성 성기를 정면에서 본 그림과 살인, 아동 강간, 식인 행위를 그렸다. 반 고흐와 고갱 또한 십대 소녀의 누드를 그렸으며 대부분의 인상파와 독일 표현주의 작가들, 클림트, 뭉크, 에곤 쉴레, 그리고 피카소와 마티스의 작품들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이 모든 예술 작품들을 누군가는 성적인 이유로 문제삼을 수 있다. 예술을 예술이게 만드는 한 가지 분명한 특징은 그 작품이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이의 심기를 해친다는 것이다. 이를 금지한다면, 예술도 금지된다.
(벌처, Jerry Salt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