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듣게 되는 단어 수는 정말로 소득 계층에 따라 현저히 다를까?
3천만 단어.
중산층이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어린이와 저소득층 가정에서 자란 어린이가 듣고 자라는 단어 수의 차이로 알려진 숫자입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차이지만, 20년도 더 전에 진행된 이 연구 결과는 별다른 도전을 받지 않고 어느덧 사실로 굳어져 통념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관련 연구를 다시 한번 진행한 결과 앞선 연구 결과의 많은 부분에 물음표가 붙었습니다.
먼저 20년 전 연구결과를 요약하면 부유한 가정에서 나고 자란 아이와 가난한 가정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뱃속에서부터 만 네 살이 될 때까지 노출되는 단어 수가 무려 3천만 개나 차이 난다는 겁니다. 전문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이 연구 결과를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나중에 아이가 자랐을 때 글을 읽고 쓰는 능력도 어렸을 때 얼마나 많은 단어를 듣고 자랐느냐와 연관이 있다며 그 영향력을 확대해 해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소득층 부모에게 어떻게 하면 어린 자녀와 더 자주, 더 다양한 어휘를 써가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을 주 정부 차원에서 운영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디애나 세인트 메리오브더우즈 칼리지의 심리학자 더글러스 스페리(Douglas Sperry)가 이끄는 연구팀은 기존의 통념을 완전히 뒤집는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20년 전 연구를 재현해본 결과 소득 계층이나 계급에 따라 아이들이 (대개 부모인) 주 양육자와의 대화를 통해 노출되는 단어의 수나 어휘의 다양성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는 겁니다.
오히려 주 양육자가 직접 건네는 말뿐 아니라 보조 양육자를 비롯해 어른들이 아이 주변에서 나누는 이야기들, 즉 아이가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르더라도 듣게 되는 단어와 어휘를 포함하면, 저소득층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중산층 이상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보다 더 다양한 말을 듣게 된다고 연구팀은 밝혔습니다. 비슷한 소득 계층 안에서 자라는 아이들이라도 다른 환경 요인에 따라 듣고 자라는 단어의 수와 어휘가 크게 달랐습니다.
스페리는 “(소득 수준에 따른) 단어 차이에 관한 통념을 과감히 벗어던질 때”라고 말했습니다.
보통 연구진은 부모가 아이에게 직접 건네는 말을 듣고 아이들이 언어를 익히고 말을 배운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스페리는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을 추가했습니다. 바로 아이에게 직접 건네는 말 외에도 아이가 어깨 너머로 듣게 되는 어른들의 이야기도 아이의 인지 발달과 어휘 학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스페리는 특히 문화적 특징이나 공동체의 특성에 따라 이 점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20년 전 연구는 캔자스주의 어린이 42명을 저소득층(poor), 노동 계급(working class), 중산층(middle class), 그리고 부유한 전문직(wealthy professional) 가정의 네 그룹으로 나눈 뒤 말을 배우는 환경을 살펴봤습니다. 스페리와 연구팀은 마찬가지로 표본의 수를 42명으로 했지만, 분류는 남쪽 볼티모어의 백인 저소득층, 앨라바바주 흑인 저소득층, 인디애나주와 시카고의 노동 계급(대체로 백인 블루칼라 노동자), 그리고 시카고의 중산층(대체로 백인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다섯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 2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진행된 두 연구 결과. 20년 전에는 (하얀색 막대그래프) 같은 캔자스주 안에서 주 양육자(대개 부모)가 아이에게 직접 건네는 말만 집계해 단어 수를 셌다. 이번 연구는 (색깔 있는 막대그래프) 각기 다른 지역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직접 건네는 말 외에도 아이가 어깨너머로 들을 수 있는 말까지 모두 헤아렸다. 그 결과 소득 계층에 따라 아이들이 노출되는 단어의 차이가 현저하다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한 허구에 가깝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연구진은 생후 18~30개월 아이가 있는 집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실제 육아 과정을 촬영했습니다. 생후 32~48개월이 될 때까지 몇 번 더 촬영과 분석을 반복했습니다. 주 양육자는 대개 부모, 그 가운데서도 아이의 어머니였습니다.
앨라바마 주의 저소득층 흑인 가정의 주 양육자가 아이에게 건넨 말을 단어 수로 환산하면 시간당 1,838단어로, 20년 전 캔자스주의 부유한 백인 가정에서 주 양육자가 아이에게 건넨 단어 수 2,153 단어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20년 전 연구에서 저소득층 가정의 주 양육자는 아이에게 한 시간에 616단어밖에 말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번에 새로 관찰한 연구 결과 나타난 단어 수의 1/3에 불과한 숫자죠. 노동 계급과 중산층의 주 양육자들은 아이들에게 시간당 각각 1,048단어, 1,491단어를 건넸습니다.
주 양육자가 한 명이 아니므로 아이들이 직접 듣는 단어 수는 (한 사람이 아이에게 건네는 말보다) 평균 17% 정도 더 많습니다. 앨라바마 주의 흑인 저소득층 가정의 경우 이 증가 폭이 58%나 됩니다. (여러 명이 여러 아이를 함께 돌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 게다가 저소득층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어깨너머로 듣는 대화는 시간당 평균 3,203단어나 됩니다. 다른 가정환경에서는 많아봤자 시간당 2,500단어 정도가 아이들에게 노출됩니다. 연구진은 흑인 저소득층 아이들에게는 더 일찍 태어난 형제 자매가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일 수 있다고 풀이했습니다.
텍사스대학교 오스틴의 문화인류학자 제니퍼 키즈 에데어는 이번 연구가 기존의 단어 차이에 관한 통념을 완전히 뒤집었다고 분석했습니다.
중산층 백인 부모들은 대체로 아이들에게 말과 어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부모와 자녀가 나누는 일대일 대화, 혹은 선생님이 직접 학생에게 건네는 말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가정하곤 하지만, 문화적 배경이 다른 곳에서 자란 아이들에게는 이런 기준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번 새로운 연구 결과만 놓고 저소득층 아이들이 노출되는 언어가 부족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 또한 섣부를 수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우선 스페리 연구팀이 20년 전 연구에서 포함했던 부유한 백인 전문직 가정을 표본에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비교가 어렵기도 하며, 20년 전 연구 결과 생겨난 통념에 따라 실제로 저소득층 부모들에게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 어휘를 신경 쓰도록 가르친 프로그램이 아이들의 어휘 발달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는 연구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구 가운데 하나를 진행한 델라웨어대학교의 심리학자 로버타 콜린코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철저히 어른들의 관심사라 할 수 있는 죽음이나 세금에 관한 이야기를 아이들이 건너 듣는다고 해서 그것이 어휘력 발달에 도움이 될까요? 아주 조금은 될지 몰라도 아이가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 말을 배우는 정도와 비교하면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스페리의 의견은 달랐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 주변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에 무척 큰 관심을 보이고, 특히 자기 자신이나 어린이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자기에게 직접 하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매우 집중해서 듣는다는 겁니다.
아이가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고 주변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실제로 말을 배우고 어휘를 익히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아직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스페리 교수와 연구팀은 앞으로 가족들의 대화를 듣게 되는 것이 말을 배우는 것과 나중에 읽기 및 쓰기 능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연구를 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사이언스뉴스, Bruce B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