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가 조던 피터슨을 두려워하는 이유
2년 전, 나는 10대인 아들이 이상한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뭘 보니?”
그는 진지하게 자신이 보는 영상을 설명했습니다.
“토론토 대학의 심리학 교수가 캐나다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래?”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아들은 이미 다시 유튜브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만 하더라도 그가 얼마나 심심했으면 심리학 강의를 듣고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날 밤, 아이는 그 내용을 내게 설명하려 했지만, 그리 중요한 이야기로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아이의 친구들, 그러니까 민주당 일색인 LA 지역의 리버럴 가정에서 자란 진보적 민주당원인 그 아이들 상당수가 이야기하는 주인공이 바로 조던 피터슨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의 대학 캠퍼스의 지배적인 분위기인 모범적인 대학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대에 대항하지도 않았고, 문화적 전유나 폭력적인 주장에 분노하는 이들에 반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학업을 따라가면서 기숙사에서, 원정 경기를 보러가는 버스 안에서, 체육관에서 조던 피터슨의 강의를 계속 들었습니다.
이 젊은이들은 힐러리에게 투표했고, 트럼프가 승리하자 충격에 빠져 집에 전화를 걸었으며, 탄핵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동시에 피터슨과 샘 해리스, 데이브 루빈, 조 로건 등이 진행하는 팟캐스트를 들었습니다. 때로 상당한 길이의, 혹은 불가사의한 주제를 다루는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들의 강의나 토론은 이들이 평생 들어온 정체성 정치에 반하는 유일한 주장들이었을 겁니다.
별일 아닌 것으로 들리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정체성 정치를 집어 던질 경우 종교, 철학, 역사, 신화 등 수많은 주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이 젊은이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데올로기의 포장 없이 직접 접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이 젊은이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정규 교육을 받으면서도, 또한 독자적인 다른 형태의 교육을 받게된 다수의 미국 대학생 집단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은 너무나 조용히 진행되었습니다. 만약 대학의 토론 공간에서 이런 주장이 퍼져나갔다면, 지식인들이 이를 관찰하고, 반박하며, 또한 적절한 학문적 토론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한 명 한 명이 이어폰을 이용해 흡수했기에, 좌파는 이 문제가 너무나 커진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1960년대, 아이들이 합창단 활동을 그만두었다는 것을 부모들이 미처 알기 전에 이미 급진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던 일과 비슷합니다. 게다가 지금 이러한 변화는 대학생들에게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나라를 통틀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이들의 팟캐스트를 듣고 있습니다. 게스트와 주제를 매우 잘 선택하는 조 로건의 독창적인 팟캐스트는 종종 피터슨의 주장을 다루고 있으며, 그 자신이, 혹은 그와 가까운 다른 사상가들이 피터슨의 주장을 더 확장합니다. 로건의 팟캐스트는 매달 수백만 회 이상 다운로드 되고 있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그 규모와 속도 면에서 기존의 사회를 지키려는 이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좌파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마침내 깨달았을 때, 이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마치 태평양을 숟가락으로 퍼내려는 시도에 가까웠습니다.
좌파들이 문제를 깨달은 것은 피터슨이 쓴 “삶을 위한 12가지 규칙”이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였습니다. 책은 좌파들이 문화의 상징이라 생각하는 매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곧바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사실 이 책은 정치와 무관한 자기계발 서적이었고 상업적 성공을 거둔 책이었기에 이데올로기적인 면에서 이 책을 공격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비판자들을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건 그냥 상식이라구요! 피터슨을 지지하는 이들은 이렇게 말했고, 동시에 또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왜 상식에 대해 저렇게 분노하지?
비판자들은 이 책이 베스트셀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이 처음 캐나다에서 출간되었을때 뉴욕타임스의 양서 목록에 오르지 않았고, 그들은 이런 책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아마존의 비소설 분야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아마 더 중요한 사실로 오디오북이 엄청나게 팔렸습니다. 피터슨의 팟캐스트와 유튜브 영상처럼, 이 책의 독자들 역시 빨래를 개느라, 트럭을 모느라, 직장과 집을 오가느라 바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책은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전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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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 잘 팔린 자기계발 서적의 저자를 아침 방송에서 부르지 않을 리 없습니다. 투데이, 굿모닝 아메리카, CBS 디스 모닝 등의 아침 방송은 사실 자기계발이라는 주제를 끝없이 변주하는 방송입니다. 하지만 PD들은 그를 꺼렸고, 피터슨 또한 스튜디오에서 연예인들 사이에 앉아 어떻게 하면 일상에서 심리적 위안을 얻을 것인지 떠드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쯤에서 유행은 멈췄어야 하지만, 그는 대신 도시를 돌며 2,500 명의 청중 앞에서 자신의 신작을 광고하는 전통적인 북 투어에 비교될만한 활동을 온라인에서 보였고 수백만 명의 숨겨진 청중이 그의 팟캐스트를 듣고 유튜브를 보게 됩니다. (피터슨의 유튜브 채널의 조회수를 다 합하면 수천만 회에 이릅니다.) 그의 책은 투데이 쇼의 홍보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좌파들은 그를 끌어내려야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소위 “인텔렉추얼 다크웹”의 일원으로 정체성 정치를 무력화시킬 크립토나이트를 대중들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의 명성을 파괴할 딱지를 그에게 붙이려는 시도는 매우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을 권장하기 위해 특정한 문화에 존재했던 사회적 압력에 대해 인류학에서 명명한 “강제적 일부일처제”를 그가 지지한다는 식입니다. 그는 이 단어를 아주 다양한 주제를 논의했던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했었고, 그 인터뷰는 정부가 성혼 사업을 주관해야 한다고 그가 믿는다는 잘못된 소문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또한 트렌스젠더들을 그들의 정체성에 맞는 새로운 대명사로 부르기를 거부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저 호칭을 강제하는 법을 지키지 않겠다고 한 것 뿐입니다.
조던 피터슨을 싫어할 수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칼 융의 이론을 지지하며,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는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 매우 진지한 사람이며 당신은 그가 좀 가벼워졌으면 하고 바랄겁니다. 그는 매우 지루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정체정 정치에도 관심이 없고, 정체성 정치에 반대하는 주장에도 관심이 없을겁니다. 그에게 동의하지 않을 정당한 수많은 이유가 있으며, 역시 선한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좌파의 그에 대한 비이성적 증오는 사실 일관적이지 못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는 바로 우리 시대에 끝없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던 좌파 세력이 실은 이미 쇠퇴하고 있으며, 사실상 매우 취약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좌파는 피터슨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정체성 정치와 완전히 반대되는, 그가 설파하는 아이디어들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얼마전 더 네이션 지의 시 편집자들이 아마추어적이지만 상당히 충격적인 시를 실었을 때, 곧바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덫이 이 시를 발견했고 시인과 편집자들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편집자들(두 사람 중 한 명은 하버드 영문과의 정교수였음에도)은 자신들의 경력이 끊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비판자들에게 비굴한 용서를 구하는, 사과문인지 유서인지 알 수 없는 해명을 추가했고, 이런 소동이 더 고귀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저 아쉽지만 사소한 해프닝으로 치부될때, 어떤 무언가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의 발행인이 트럼프의 “반 언론적 표현이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그와 만난다고 쓴지 3일 후, 트위터를 통해 백인, 공화당원, 경찰, 대통령에 대한 증오를 표현했고 다른 어떤 여성 언론인이 사라지기를 바란 한 여성 기자를 뉴욕타임스는 채용했고, 특히 그녀를 단순한 기자가 아니라 편집국 – 한 신문의 논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 에 앉혔을 때, 부패한 시스템을 대체하기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자라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겁니다. 정체성 정치의 계관 시인이라 할만한 바락 오바마조차도,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남아공에서의 연설 중, 누구도 백인이라는 이유로 “할 말을 하지 못한다면” 문명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른 것이라며 자신들에게도 잘못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했고, 이러한 조난 신호조차 무시된다면, 운명의 시계는 더 빨리 끝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좌파가 이런 최후의 절규를 하고 있을때 일군의 사상가들이 등장합니다. 피터슨은 그 선두에 선 이로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이를 간절히 원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합니다. 그의 독자는 셀 수 없이 많고 매우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상당 수는 백인 남자입니다. 좌파들은 이들이 당연히 공화당원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대안 우파는 좌파 못지 않게 정체성 정치를 옹호하고 있으며, 최근 대안 우파 웹사이트인 카운터-커런트에 실린 한 에세이의 제목이 이를 말해줍니다. “조던 피터슨의 정체성 정치 거부는 백인 문화 말살을 불러올 것이다.”
더 네이션의 시 사건, 뉴욕타임스의 채용, 그리고 오바마의 고뇌에 찬 연설을 낳은 그런 종류의 철학에 대한 반발이 도날드 트럼프의 당선과 무관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당신은 아직 꿈속에 살고 있을 뿐입니다. 또한 이들의 광기를 막을 수 있는 것이 공화당 뿐이라 생각한다면, 당신은 또다른 종류의 환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나라를 통틀어, 트럼프의 백악관이 차별하는 사람들 못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의 문화를 결정하는 정체성 정치의 셀 수 없이 많은 기이한 주장들에 의해 차별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데올로기를 찾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아이디어를 찾고 있습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나쁜 것과 좋은 것을 점점 더 잘 구별하고 있습니다. 민주당은 이들을 비웃음으로써 위험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공화당은 어리석게도 이들을 감사히 여길 줄 모릅니다.
아마 피터슨의 새 책에서 가장 위험한 “상식”은 그가 기존의 강력한 질서와 맞서 싸우기를 원하는 누구에게나 주고자하는 지혜인 첫 번째 규칙일 겁니다. 그것은 바로 “어깨를 쭉 펴고 당당하게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아틀란틱, Caitlin Flanag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