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고니아 vs 트럼프 (1/5)
파타고니아 본사는 남부 캘리포니아의 한적한 바닷가에 늘어선 벽토를 바른 낮은 건물들에 입주해 있습니다. 태양 전지판이 있고, 주차장에는 피크닉 테이블이 펼쳐져 있으며, 본사 입구 옆에는 직원 자녀들이 다니는 어린이집도 있습니다. 정글짐 놀이기구가 어린이집임을 확인이라도 하듯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바다가 있으니 직원들은 점심식사 후에 일하러 오기 전에 잠깐 서핑을 즐기고 오기도 합니다. 전형적인 캘리포니아식 이상주의자가 운영하는 비공개회사인데 매년 솜털을 넣어 누빈 재킷이나 면바지 등을 10억 달러씩 팔아치우는 브랜드니, ‘신의 직장’ 비슷한 분위기가 풍기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의 날씨치고도 유난히 더웠던 지난해 12월 어느 월요일 아침, 파타고니아 본사 분위기는 사뭇 달랐습니다. 어디를 보나 한적한 분위기만 나던 사무실 전체가 마치 전시 상황실을 방불케 하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워싱턴에 있는 변호사들과 긴급회의를 하는가 하면 이미 법원에 제출할 소장과 서류도 준비가 된 듯했습니다. 웹디자이너들은 분주히 회사 홈페이지를 바꾸고 있었습니다.
잘 나가던 파타고니아 시장에 급히 손봐야 할 문제가 생긴 건 아니었습니다. 대신 정치적인 부분에서 파타고니아의 심기를 크게 건드린 일이 터졌습니다.
몇 시간 전 트럼프 대통령은 유타주에 있는 천연기념물인 자연보호구역 두 곳의 영역을 크게 줄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레드록캐니언과 이어진 곳으로 일대에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현장이 여러 곳 있는 베어스이어즈(Bears Ears)는 100만 에이커 이상, 무려 85%나 줄어들 위기에 처했습니다. (줄어드는 땅은 남한 면적의 40%에 해당) 또 다른 천연기념물 그랜드 스테어케이스 에스칼란테의 영역도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트럼프 대통령은 밝혔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방정부의 월권행위를 바로잡는 일이라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유타의 자연환경과 천연자원을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워싱턴에 있는 관료들이 관리하고 운영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제가 한마디만 하죠. 그 생각은 틀려먹었어요.”
미국 인디언 단체와 자연보호단체, 그리고 이들을 후원해 온 파타고니아 같은 곳들이 가장 우려하던 일이 터진 겁니다. 바로 트럼프 행정부가 천연자원 개발을 위해 그간 공공의 땅으로 보존해 온 지역을 빼앗으려 드는 상황입니다.
파타고니아는 다른 어떤 회사보다도 이런 상황에 잘 대비가 돼 있는 회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창업 후 45년이 넘는 세월 동안 파타고니아는 의류 사업뿐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행보를 꾸준히 밟아 왔습니다. 여느 미국 기업과는 상당히 다른 전통입니다. 회사들도 총기 규제나 성 소수자 권리 등에 관해 의견을 밝히고 이를 사업에 반영해야 한다는 요구가 요즘 들어 나오기는 하지만, 여전히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걸 어색하고 불편해하는 회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파타고니아는 이미 1970년대부터 정치적인 문제에 관해서도 타협을 거부하며 자기 목소리를 내 왔습니다.
파타고니아는 스스로 “활동가 회사”라고 부를 만큼 환경 보호와 공정무역, 엄격한 노동권 등의 문제에서 분명한 태도를 보이며 사업을 해왔습니다. 실제로 풀뿌리 환경운동가 수천 명을 후원하고 있기도 한 파타고니아는 지난 2012년부터 베어스이어즈 지킴이를 자처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까지, 취임 후 거의 1년 가까이 파타고니아는 트럼프 대통령과 별다른 마찰을 빚지 않았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천연기념물 대폭 축소를 발표한 그 날 아침은 마침내 올 것이 온 날이었습니다. 앞서 직원 50여 명이 회의실에 모여 대통령의 발표를 함께 지켜봤죠. 분위기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발표가 난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파타고니아는 홈페이지를 새로 꾸몄습니다. 형형색색의 옷가지와 제품 판매 관련 문구가 적혀있던 홈페이지에는 새까만 배경에 대문짝만한 하얀 글씨로 다음의 메시지를 띄웠습니다. “대통령이 당신의 땅을 훔쳐갔다.”
같은 시각, 파타고니아 법무팀도 계획대로 움직였습니다. 이미 몇 달간 준비해 온대로 대통령을 고소할 참이었습니다.
지역의 몇 안 되는 시민단체와 함께 법무법인 호건 로벨스(Hogan Lovells)를 통해 파타고니아는 워싱턴 지방법원에 소장을 냈습니다. 소장에 명시한 피고는 트럼프 대통령과 (국립공원을 비롯한 미국 내 천연기념물을 관리하는 일이 주요 업무인) 내무부장관 라이언 징케, 농무부 장관, 그리고 국토관리청과 산림청장이었습니다. 소장에 담긴 주장은 간단했습니다. 1906년 제정된 국가유물관리법(The Antiquities Act)은 대통령에게 국가 기념물을 지정할 수 있는 권한을 줬을 뿐, 이를 축소하거나 잘라내는 권한은 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대통령이 국가 기념물과 국가가 관리하는 보호 구역을 지정하는 권리는 이 법을 통해 인정됐다. 하지만 의회는 지정된 기념물과 보호 구역을 대통령이 다시 줄이거나 지위를 박탈할 수 있다고 허락한 적이 없다. 그런 권한은 오직 의회만 가지고 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목소리를 낸 대가로 파타고니아는 오랜 세월, 자연히 적을 만들어 왔습니다. 토지 개발자들, 화석 연료를 주로 다루는 에너지 업체들, 정치인들에 이르기까지 호시탐탐 파타고니아를 쓰러트리려는 이들이 어느덧 줄을 섰습니다. 이번에도 파타고니아는 가장 먼저 이들과 싸움을 벌여야 했습니다. 파타고니아가 천연기념물 축소 및 지정 해제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자 트럼프 행정부는 즉각 반격에 나섰습니다. 징케 장관과 공화당 의원들은 파타고니아가 옷을 파는 데 정치를 활용하고 있다고 맹비난했습니다. 트위터에는 반(反) 파타고니아 세력들이 파타고니아를 보이콧하자는 해시태그를 퍼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파타고니아는 전혀 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결의를 다지며 싸움을 벌여나갔습니다. 창업자는 CNN에 출연해 트럼프 행정부를 “악마”라고 규정했습니다. 파타고니아의 CEO 로즈 마르카리오는 베어스이어즈를 지키는 데 회사의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공표했습니다.
“파타고니아는 늘 풀뿌리 단체들과 일종의 동반자처럼 지내 왔습니다. 처음부터 쭉 그랬기에 파타고니아에 풀뿌리 운동의 피가 흐른다고 할 수도 있죠. 그런데 지난 대선 이후 싸움을 훨씬 더 시급하고 격렬해졌습니다. 전례 없는 일이 자꾸 일어났습니다.”
본사에서 한 인터뷰 중에 마르카리오가 한 말입니다. 창밖으로 성조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파타고니아와 트럼프 대통령은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충돌이 불가피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 몇 시간 뒤에 전혀 예기치 못한, 훨씬 급박한 위기 상황이 발생하고 맙니다. 파타고니아 본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타 파울라 일대에서 산불이 난 겁니다.
캘리포니아 남서부 산타 아나 일대에서는 겨울에 푄 현상이 나타나 태평양에서 불어온 바닷바람이 산을 타고 넘어오면서 고온건조한 바람으로 변하곤 합니다. 이날도 같은 바람이 불씨를 키워 큰 산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파타고니아 본사가 있는 벤투라 일대에는 대피령이 내려졌습니다. 공교롭게도 파타고니아가 굳은 결심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고소하려고 마지막 준비를 서두르던 직원들은 다른 것들을 챙길 여유도 없이 강제로 퇴근해 안전한 집으로 대피해야 했습니다. 파타고니아 커뮤니케이션 팀장인 코를리 케나는 이날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법정 다툼을 벌일 때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시나리오를 최대한 꼼꼼히, 철저하게 준비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정작 소장을 제출하려던 그때 당장 사무실을 비우고 피해야 할 만큼 큰 산불이 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죠. 정확히 두 시점이 겹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뉴욕타임스, David Gel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