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버블을 넘어서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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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膜) 결백한 아무것도 다투다 도자기 승자 면(綿) 메뉴 과제 날씬한 어우러지다 가정부
위의 영어 단어를 나열해도, 이를 우리말로 옮겨 다시 나열해도 마찬가지로 아무 뜻도 없는 단어의 나열일 뿐입니다. 영어 사전에서 무작위로 단어를 뽑아 늘어놓았을 뿐이니 그 자체로는 아무런 뜻이 없는 게 당연합니다. 단어를 번역해도 마찬가지죠. 대신 저 단어의 배열은 메타마스크(MetaMask)라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오직 나만을 위해 생성된 배열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가 있습니다. 암호학의 세계에서는 이를 “씨앗구(seed phrase)”라고 부릅니다. 그냥 읽어보면 자유 연상으로 막 쏟아낸 단어들처럼 보이지만, 이 단어의 배열은 디지털 은행 계좌나 온라인 신분증을 잠그고 여는 데 필요한 비밀번호이자 열쇠로 바뀔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몇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먼저 주어진 씨앗구를 안전한 곳에 저장해두라는 주의사항이 뜹니다. 나만 보는 수첩에 잘 적어두거나 개인 컴퓨터에서도 안전한 곳에 잘 적어두면 됩니다. 위의 12개 단어를 메모장에 적어놓고 나서 버튼을 누르자 씨앗구는 이제 아래 64개 글자로 변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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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아무 의미 없는 이 글자의 배열을 암호학의 세계에서는 “개인 열쇠(private key)”라고 부릅니다. 현관문을 열 때 집주인의 열쇠를 넣어야 자물쇠를 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의 개인 열쇠는 온라인상에서 당신의 신원을 입증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쓰일 수 있습니다. 제 씨앗구를 입력할 때마다 저 64개 글자로 된 개인 열쇠가 매번 똑같이 생성됩니다. 하지만 개인 열쇠인 64개 글자를 알더라도 거꾸로 12개 단어의 배열인 씨앗구를 찾아내는 방법은 아직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복사할 수 없는 열쇠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던 12개 단어의 배열을 반드시 안전한 곳에 적어둬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이제 개인 열쇠는 암호화 과정을 두 차례 더 거치고 나서 또다시 새로운 배열을 생성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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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자 배열이 바로 이더리움 블록체인상에 생성된 제 고유 주소입니다.
이더리움은 비트코인처럼 암호화폐의 일종입니다. 비트코인 가격은 지난해 1년 사이 1,000% 이상 폭등했죠. 이더리움 블록체인상에서는 주로 이더(Ether)라는 암호화폐를 주고받습니다. 다만 이더리움 블록체인의 쓰임새를 단지 화폐에 국한하기에는 그 가능성이 훨씬 무궁무진합니다.
이더리움 고유 주소가 있다는 건 이 세상의 일에 비유하자면 은행 계좌를 열었거나 이메일 계정을 만들어 이메일 주소가 생겼다거나, 혹은 주민등록번호를 받았다는 뜻이 됩니다. 지금은 일단 제 컴퓨터 화면에 적힌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글자의 배열에 불과하지만, 제가 크라우드펀딩에 동참하거나 온라인상에서 투표를 하는 등 무언가 거래를 시작하려는 그 순간 제 고유 주소는 전 세계 컴퓨터 네트워크상에 전송되고, 제가 하려는 거래를 인증하는 작업이 진행됩니다. 첫 인증 결과가 더 넓은 네트워크로 다시 전송되면 더 많은 컴퓨터가 아주 복잡한 수학 계산을 경쟁적으로 합니다. 이 계산 경쟁에서 승리한 컴퓨터만이 오직 하나의 진본에 해당하는 거래 기록을 이더리움 장부에 기록하게 됩니다. 이 거래는 계속해서 쌓아 올리는 데이터 블록에 기록됩니다. 그래서 이 기록을 부르는 이름이 블록체인입니다.
거래 시작부터 완료까지 걸리는 시간은 몇 분이 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온라인상의 거래와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일입니다. 하지만 기술에 관한 차원에서 본다면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기적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저는 지금 전통적으로 신용을 담보로 거래를 매개해주는, 즉 거래 당사자 양측 모두가 믿기에 통하는 기관의 중개 없이 거래를 완료했고, 이 내용을 기록해뒀습니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거래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중에 제 거래 내역을 누군가 낱낱이 들여다본 것처럼 느껴지는 섬뜩한 맞춤형 광고를 받을 일도 없습니다. 신용 평가기관이 제 거래를 확인해 신용점수를 매길 수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거래입니다.
이 모든 걸 가능케 하는 플랫폼은 누구의 소유도 아닙니다. 이더리움 주식회사의 지분을 가진 벤처 투자자들 같은 건 없습니다. 애초에 이더리움 주식회사도 없으니까요. 조직의 구조 자체로만 보면 이더리움은 우리가 아는 사기업보다 훨씬 더 민주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회사 안에서는 제왕이나 다름없는 CEO도 없고, 이더리움 커뮤니티에 들어가 거래를 하고 이더리움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당신은 이더리움이라는 플랫폼을 함께 꾸려가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됩니다. 비트코인을 비롯한 많은 블록체인 플랫폼과 마찬가지로 이더리움도 공식적인 단체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의지와 행위가 모여있는 것입니다. 그 경계도 명확하지 않고, 그 안의 위계질서란 사실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모두가 수평적인 관계로 연결돼 있습니다.
이더리움에 초창기부터 참여해 온 사람들 가운데는 이미 수천억대 자산가가 된 사람도 꽤 있습니다. 1이더의 가격은 2017년 1월 1일 8달러에서 2018년 1월 1일에는 843달러로 100배 이상 올랐죠. (글을 쓰는 3월 25일 오후 현재 527달러)
이 암호화된 거래 과정을 두고 그야말로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여전히 당신은 그러든 말든 상관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비트코인이든 이더리움이든 가격이 이렇게 순식간에 어마어마하게 오르내리는 걸 보면 분명 정신 나간 투기 광풍처럼 보이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 그 배경에 대단한 기술적인 혁신이 있다, 어떻다 해도 실제 사용할 때는 온라인뱅킹에 접속해 신용카드 빚 갚는 과정과 크게 다를 것도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에 관심을 거두어버린다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닌 인터넷의 역사를 떠올려봅시다. 처음에는 몇몇 괴짜 과학자나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지던 인터넷이 더 많은 이들에게 보급되고 쓰이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만큼이나 바꿔놓았죠.
만약 1970년대에 이메일을 처음 개발하던 때 이메일 사용자가 계정을 공개할지, 아니면 암호화를 거쳐 개인 열쇠를 사용해 쓸지를 결정할 수 있게 정해뒀다면 소니 영화사부터 클린턴 행정부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낸 존 포데스타까지 수많은 이들을 곤경에 빠트린 이메일 해킹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일반인들도 개인정보 유출이나 도용을 우려하지 않아도 됐을 테고요. 월드와이드웹(www)을 발명한 팀 버너스리가 처음부터 인터넷 자체에 이용자의 사회적 정체성 혹은 신원을 식별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했다면 페이스북이 존재할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이더리움 같은 블록체인 플랫폼을 굳게 믿고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은 신뢰를 네트워크 전체에 분산해 기록하고 담보하는 블록체인 기술의 개발과 적용이 먼 훗날 역사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암호화폐 가격이 이토록 급격히 오른 배경에도 바로 이렇게 굳건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비트코인 거품에 관한 논의에 너무 신경을 빼앗기다 보면 오히려 그 기반 기술인 블록체인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블록체인 지지자들 가운데 비트코인이 기존 화폐를 대체하리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신 이들은 지금 우리가 아는 인터넷의 근본적인 구조와 환경이 바뀌고 온라인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탈집중화된 평등한 곳으로 바뀌리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그래서 블록체인이 곧 우리의 미래라고도 말합니다. 이 주장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분석해보려 합니다. 다만 그 전에 먼저 인터넷의 기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뉴욕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