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상위 0.1% 부자들은 어떻게 자녀를 “망치지 않고” 교육하려 할까?
부유한 학부모는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것과도 같습니다. 몸에 좋은 음식만 해 먹이고, 어릴 때는 가장 좋은 보모를 붙여줍니다. 또 좋은 선생님을 모셔 가르치고, 휴가 때마다 해외여행에 경쟁이 치열해 다른 친구들은 꿈도 꿀 수 없는 곳에 없는 자리를 만들어 무급 인턴을 하게 해주는 등 소중한 경험도 하게 해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돈이 아무리 많은 학부모도 당연히 걱정이 있습니다. 자녀에게 좋은 건 다 누리게 해주면서도 이런 혜택이 무한하지 않다는 걸 어떻게 가르칠지의 문제입니다. 저는 지난해 펴낸 책 <불안한 거리: 부자들은 무엇을 걱정하나>를 위해 대단히 부유한 학부모 약 50명을 인터뷰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자기 아이가 “다 가진 아이”로 자라게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문제의 다 가진 아이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게으르고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있으며, 욕심이 많고 무례하고 이기적이고 스스로 쉽게 만족하고 마는 아이를 뜻합니다. 학부모들은 어떻게든 아이를 현실적인 감각을 잃지 않는, 평범한 보통 아이로 키우려고 무던히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처음부터 버릇없는 아이를 키우겠다는 부모야 있을 리가 없지만, 물질적으로 사실상 원하는 걸 다 해줄 수 있는 재력이 있는 부모에게는 아이를 똑바로 키우는 게 특히 쉽지 않아 보입니다.
특히 오늘날 부유한 학부모들이 아이를 잘 키우기 더욱 어려워진 이유는 사회적으로 부자를 곱지 않게 보는 시선이 있고, 전반적인 경쟁이 모든 분야에서 대단히 치열해졌기 때문입니다. 20세기 내내 미국에는 사실상 상류층이 있었습니다.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WASP) 가운데서도 원래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가산을 물려받은 이들이었는데,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사교계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물려받은 재산은 평생을 풍족하게 살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을 불리는 일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보통 사람보다 더 나은 부류에 속하는, 더 높은 사람이라는 시각을 공공연히 내비쳤습니다. 자식들은 그런 부자들만 다니는 엘리트 사립학교에 보냈고, 거기서 친분을 쌓아 끼리끼리 결혼해 상류층끼리의 결속을 다졌습니다. 그렇게 특권을 작은 공동체 안에서만 나누어 가지고 즐겼죠.
지난 몇십 년 사이 이러한 ‘끼리끼리 상류층 문화’는 점점 균열되기 시작했고, 사회적으로도 배척됐습니다. 특히 금융계를 중심으로 일해서 많은 돈을 번 ‘신흥 상류층’이 등장했죠. 새로운 고소득자들은 수도 많았지만, 그 배경도 다양했습니다. WASP 남자가 아닌 사람도 많았죠. 이는 결국 기존에 경쟁이 없던 분야에도 경쟁을 촉발했고, 특히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동시에 불평등을 문제 삼고 더 평등한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여론이 널리 지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컬럼비하대학교의 사회학자 샤머스 칸이 2012년 자신의 저서 <특권>에서 지적했듯이 이제는 부자로 태어났다고 부유함을 비롯한 특권을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지났습니다. 대신 그들은 자신이 이런 특권을 누려도 된다는 능력을 열심히 일해서 입증해내야 합니다. 동시에 부유한 사람을 욕심 많고 게으르며 아는 것 없이 천박하고 돈만 밝히는 사람으로 그리는 대중문화가 퍼졌습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경쟁은 더 치열해졌고, 부자를 향한 윤리적 잣대도 더 엄격해졌습니다. 대학 졸업장이 있는 젊은이들이 갈 수 있는 일자리마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게다가 경제위기 탓에 빈부격차는 그 어느 때보다 극명하게 드러났고, 가장 부유한 사람들은 모두가 경제적으로 힘든 이때 자기만 윤택하게 사는 사람들로 그려져 더 많은 비난을 받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유하면서 동시에 윤리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기란 정말 쉽지 않아 보입니다. 부자들도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만난 학부모들이 하나같이 고민하던 것도 결국 어떻게 하면 자녀들이 지금 누리는 걸 감사히 받아들이면서 잘 자라서 근면·성실하며 상식적인 소비자가 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부모들은 자주 아이들을 평범하게, 여느 아이들처럼 키우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이 단어를 쓸 때마다 넓고 튼튼한 중산층이 미국을 지탱하는 허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고 무언중에 말하는 듯했습니다. 동시에 부모들은 자녀가 갈수록 치열해지는 학교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고 이어 사회생활을 할 때도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얼마만큼, 어디까지 뒷바라지를 해주느냐와 어디쯤에서 선을 긋고 절제를 가르치느냐는 일종의 딜레마인 셈입니다.
자녀를 어느 학교에 보낼지를 포함해 교육에 관한 결정을 내릴 때 특히 이 딜레마는 더욱 도드라집니다. 많은 부모가 원칙적으로는 공교육이 잘 돼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막상 학생 수도 많고 예체능 방과 후 활동도 좋지 않고 무엇보다 좋은 대학교에 가기에 아무래도 전폭적인 지원을 받기 어려운 공립학교에 자기 자녀를 보내는 건 주저하게 되는 학부모가 많습니다. 특히 중산층에게도 적잖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사립학교 등록금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부자들로서는 더욱 그렇죠. 하지만 사립학교에 보내기도 한편으로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자기와 비슷한 극소수의 부잣집 자제들하고만 어울리다 보면 세상을 보는 눈이 왜곡되지 않기가 더 어려울 테니까요. 금융계에서 개인사업을 하는 저스틴은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내야 할지를 두고 적잖이 고민했습니다.
“아이들이 평범하게 자랐으면 했어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다 해주는 그런 환경에서만 자라서 크고 나서도 부자들끼리 어울리기나 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건 정말 싫었어요.”
또 다른 부유한 학부모 케빈도 공립학교를 선호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아들이 엘리트밖에 없는 좁디좁은 세상 속에 갇혀 ‘맨날 자기 옷 골라주는 코디와 보모들은 이래서 문제야, 저래서 문제야 같은 불평이나 하는 게 전부인 특정 부류의 사람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크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돈을 벌고 사는 데 필요한 노동, 즉 일자리도 부모를 진퇴양난에 빠트리는 문제입니다. 저와 이야기를 나눈 모든 부모는 자녀가 근면,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으로 자라주기를 기대했습니다. 어떤 부모는 어려서부터 원하는 것을 다 누리며 자란 아이가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커서 오히려 원하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이라며 걱정하기도 했죠. 지금 재산이면 평생 자녀를 금전적으로 먹여 살리고 지원할 수 있는 부모들도 대부분 단호히 그렇게 하지는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자산이 5천만 달러가 넘는 스캇이라는 사람은 특히나 아이들이 돈만 많지만 무능하기 짝이 없는 ‘게으른 잉여 인간’으로 자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정말 끔찍한 일이라며 겁에 질려 했습니다. 부모들은 또 아이들이 물질만능주의에 찌들어 돈을 마구 써대는 소비자가 되는 것도 경계했죠. 한 아버지는 아들이 ‘(쓸 수 있는 돈에) 한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부모들은 집안일을 심부름처럼 시킨 뒤 그 대가로 용돈을 줌으로써 노동과 소비를 가르치려 했죠. 수백억 대 자산가인 한 어머니는 6살 난 아들에게 자기 빨래를 직접 하게 했습니다. 그녀는 지금부터 하나하나 이 집안에서 태어나 누리고 있는 걸 배워가고 감사히 여기도록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노동의 대가로 용돈을 주며 간단한 경제 원리를 가르치기 시작한 학부모들은 자녀가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어도 이를 계속하겠다고 굳게 다짐합니다. ‘1달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세상 물정 모르는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다짐은 자녀들의 학년이 올라갈수록 흐지부지되기 일쑵니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케이트는 자신이 어렸을 때 집안에서 용돈을 받기 위해 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내게 주어진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일을 하면 대가로 얼마를 받고 그렇게 어렵게 일해서 번 돈이기에 허투루 쓰지 않고 계획을 세워 써야 한다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배움이었죠.”
하지만 그녀의 파트너인 네딘의 생각은 다릅니다. 네딘은 부잣집에서 태어나 자랐고, 적지 않은 가산을 물려받았는데, 딸이 동네 식료품점에서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알래스카 바닷가에 있는 바다표범을 연구하겠다고 했을 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맞아요. 노동의 가치가 어떤 건지 몸소 배우는 건 좋은 일이죠. 일해서 돈을 벌어봐야 한 푼 한 푼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알고요. 저도 제 아이들이 그런 소중함을 전혀 모르는 개념 없는 은수저 같은 아이로 자라는 건 싫어요. 하지만 동시에 저는 아이들의 삶이 정말 재미있고 더 신나는 기회를 좇기에도 길지만은 않다고 생각해요. 좀 다른 걸 했으면 하는 거죠.”
아이들에게 예산에 한도가 있다는 점을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간단합니다. 직접 한계에 맞닥뜨리게 아이들의 씀씀이를 제한하는 거죠.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치열하게 고민하며 안절부절못하는 부모들도 결국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제약을 가하지 못하는 게 보통입니다. 사립학교의 단점을 줄줄 읊어대며 우리 아이는 그렇게 키우지 않겠다던 부모들도 결국 아이가 학교에 진학할 때가 되면 무슨 이유로든 마음을 바꾸곤 하죠. 이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정하는 한도, 제약이란 아주 사소한 정도에 그칩니다. 앞서 사회학자 앨리슨 퓨는 2009년 저서 <갈망과 소유>에서 이를 가리켜 ‘상징적인 박탈’이라고 불렀습니다. 대학 입시가 전에 없이 치열한 요즘 저와 인터뷰했던 부모들 가운데 고등학생 자녀에게도 집안일을 도와야 용돈을 주는 시종일관 엄격한 부모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부모들은 그저 학교 숙제를 열심히 해가는 게 학생의 본분이자 노동에 해당하니 그걸로 대신하고 있다는 식으로 상황을 정당화했죠.
직접 아이들의 특권을 제한하는 대신 부모들은 아이들이 특권에 관해 느끼는 감정을 규제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즉, 아이들이 또래의 보통 친구들은 누릴 수 없는 좋은 사교육을 받고, 대궐 같은 집에 살며, 유명 디자이너가 만든 메이커 옷을 입고 여행 갈 때는 비즈니스 클래스 아니면 전세기만 타고 다니는 삶이 정말 흔치 않은 상황에 해당하니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부모들은 이런 특권이야말로 정말 특별한 선물 같은 거라고 말합니다. 앨리슨 퓨는 일 년에 보통 두 차례 떠나는 가족 휴가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호사스럽고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시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하죠. 이렇게 사는 사람이 정말 흔치 않다는 사실을 아이들도 알아야 하고, 이런 삶이야말로 정말 특별한 선물과도 같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게 생각했으면 합니다.”
부모들은 같은 이유에서 아이들이 ‘평범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보통 사람들과 어울리게 하는 등 방법을 찾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이라는 표현은 한 백만장자 어머니가 썼던 표현인데, 또 다른 부자 어머니는 일부러 평범한 아파트에 사는 중산층 가족과 친분을 쌓으며 자신의 아이가 그 친구네 가서도 놀고 시간을 보내게 합니다.
“사립학교 다니는 아이들의 가족은 전부 다 비슷하거든요. 전 우리 가족이 좀 더 평범한 사람들과도 계속 어울리며 그 사람들이 사는 모습도 낯설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이들도 보통 사람들, 평범한 집안의 자식처럼 커준다면 가장 이상적일 겁니다. 열심히 일하고 검소한 소비자가 되며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고 살아간다면 말이죠. 그러면서도 자신이 완전히 평범한 건 아니며, 자신이 누리는 이 많은 혜택과 특권을 남들에게 자랑하지 않고 속으로 감사하게 여길 줄 아는 아이라면 정말 더 바랄 나위 없겠죠. 그럴 수만 있다면 평등하지 않은 분배도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부자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주어진 부에 감사하며 도덕적으로 비난받기 전에 책임있게 부를 행사하며 살 수 있는 셈이죠. 오늘날 부자들은 물려받은 부든 일해서 쌓은 부든 특권을 노골적으로 누리거나 특권을 너무 신경 쓰지 않는 한 부자로 살아가는 데 걸림돌이 없는 것 같습니다. 특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한 누려도 되는 세상인 것입니다. (A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