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우울증에 대해 알고있는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면?(1/2)
1970년대 어느 때 쯤, 우울증에 대한 놀라운 진실 한 가지가 우연히 발견되었지만 곧 무시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 진실이 매우 불편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파괴력이 매우 컸기 때문입니다. 당시 미국의 정신과 의사들은 미국의 모든 정신질환자들이 동일한 진단과 처방을 받을 수 있도록 각 정신 질환의 증상을 자세히 기록한 책을 펴 내고 있었습니다. 그 책은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DSM)”이라 불립니다. 당시 최신판에 그들은 우울증 진단을 받기 위한 9가지 증상을 기록했습니다. 그 중에는 즐거움에 대한 낮은 관심이나 침울한 상태의 지속 등이 있었습니다. 이 중 다섯 가지 이상이 몇 주 동안 나타날 경우 의사는 당신을 우울증으로 진단했습니다.
미국 전역의 의사들은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진단했습니다. 얼마 후 의사들은 이 책의 저자들에게 문제점을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이 책을 따른다면, 그들은 자신을 찾아오는 모든 비탄에 빠진 사람들을 우울증으로 진단하고 그들에게 약을 처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들은 자동적으로 우울증 증상을 가지게 됩니다. 의사들은 가족을 잃은 모든 미국인이 우울증 약을 먹어야 하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자들은 결국 우울증 항목의 마지막에 예외조항을 덧붙였습니다. 그들은 지난 1년 사이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은 우울증 진단을 받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이는 그런 상황에서 위의 우울증 증상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따라서 질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는 “애도 예외(the grief exception)”라 불렸으며, 이로써 문제는 해결된 듯이 보였습니다.
다시 십 수년이 지나면서 의사들은 또다른 질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환자들에게 우울증은 그저 뇌에서 발생한 우연한 화학적 불균형, 곧 세로토닌 감소와 몇몇 화학물질의 결핍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이는 우울증이 당신의 삶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당신의 뇌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몇몇 의사들은 이 설명과 애도 예외의 관계에 의문을 가졌습니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나타나는 우울증 반응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반응이라면 다른 상황에서 나타나는 우울증 반응 또한 그럴 수 있지 않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을 잃었을때는 어떨까요? 당신이 싫어하는 일을 앞으로 40년 동안 해야된다면요? 친구가 없어 외로움을 느낄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애도 예외는 우울증의 원인이 뇌라는 굳은 주장에 구멍을 낸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는 우울증의 원인이 화학물질이 아니라 실제 세상에 있으며 그 문제를 살펴 해결해야 함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향은 몇몇 예외적인 의사들을 제외한 주류 정신과의사들은 원하지 않던 방향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 문제를 단순하게 처리했습니다. 바로 애도 예외의 기간을 줄여나간 것입니다. 편람의 새 버전이 나올때마다 우울증으로 판정되지 않을 수 있는 애도의 기간은 짧아졌고 어느새 한 두달로 줄었다가 결국 애도 예외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당신의 아기가 오전 10시에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신의 의사는 10시 1분에 당신이 우울증이라 진단하고 약을 줄 수 있습니다.
아리조나 주립대의 조앤 카시아토레는 자신의 아이 샤이엔을 출산 중에 잃은 뒤 애도 예외의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슬픔에 빠진 이들이 그저 슬픔에 빠져 있다는 것 만으로 우울증 진단을 받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그녀는 이 논쟁이 우리가 우울증, 불안, 그리고 다른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의 문제를 핵심적으로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곧 우리는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슬픔을 실제 삶과 무관한 몇 가지 질문에 답하는 것 만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여기며, 이를 그저 뇌의 이상으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우울증이나 불안증의 진단을 위해 그들의 실제 삶을 고려하게 만드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조앤은 이를 위해서는 “전체 시스템을 완전히 뜯어 고쳐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가 극도의 슬픔을 겪고 있다면, 우리는 그 증상을 해결해서는 안됩니다. 증상은 본질적인 문제의 전달자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 본질적인 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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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우울증 약을 먹은 것은 십 대 시절이었습니다. 나는 한 런던의 쇼핑센터에서 영국의 뿌연 햇빛 아래 약국 앞에 서 있었습니다. 작고 하얀 알약을 나는 꿀꺽 삼켰고, 이는 화학적 키스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날 아침 나는 의사를 만났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이 마치 나쁜 냄새처럼 나를 괴롭히며 수 년 째 이런 고통을 겪고 있다고 힘들게 말했습니다. 그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을 기분좋게 만드는 세로토닌이라는 화학물질이 있지만 어떤 이들은 이 물질이 부족한채로 태어난다. 너는 분명 그런 아이구나. 그러나 다행히도, 이제는 너의 세로토닌 양을 보통 사람의 수준으로 올려주는 약이 있단다. 그 약을 먹으면 좋아질꺼야. 마침내 나는 내 머리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게된 것입니다.
그러나 약을 먹은 지 몇 달 후,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고통이 다시 나를 덮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래지 않아 나는 약을 먹기 전과 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나는 의사에게 다시 갔고 그는 내가 너무 적은 양을 먹고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20밀리그램은 30밀리그램이 되었고 흰 알약은 푸른 알약으로 바뀌었습니다. 몇 달 동안 나는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고통이 찾아 왔습니다. 약의 강도는 점점 세어졌고 나는 지금 80mg 알약을 수 년 째, 중간의 짧은 휴식기 몇 번을 제외하면 먹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나는 내 책 “마지막 연결: 우울증의 진짜 이유를 찾아서 –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해답(Last Connections: Uncovering The Real Causes of Depression – and the Unexpected Solutions)”을 쓰기 위해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내게는 두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나는 그들이 하라는 모든 것을 하고 있는데도 왜 여전히 우울증에 빠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저(低)세로토닌증으로 진단되었고 세로토닌 수준을 높이는 약을 먹고 있지만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서구에 나처럼 느끼는 이들이 왜 그렇게 많은가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성인 다섯 명 중 한 명이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정신질환 약을 먹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지난 십년간 우울증 처방은 두 배 늘었고, 11명 중 한 명이 같은 증상으로 약을 먹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울증과 그 쌍둥이인 불안증을 야기하는 것일까요? 나는 물었습니다. 정말 이 모든 것이 각자의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일까? 이 많은 사람들의 뇌가 동시에 잘못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걸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나는 전 세계 4만 마일을 여행했습니다. 나는 이 문제를 최전선에서 연구하는 사회과학자들을 만났고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우울증을 해결한 사람들 – 인디애나의 아미쉬 마을과 우울증 약 광고를 금지한 브라질의 한 도시, 그리고 놀랄만한 실험을 진행중인 발티모어의 한 상점 등 – 을 만났습니다. 이를 통해 나는 무엇이 우울증과 불안증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과학적 증거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들어온 이야기가 잘못 되었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나는 우울증과 불안증을 야기하는 요인으로 유전자를 포함한 생물학적 요인 두 가지 외에도 오늘날 사회에서 야기되는 일곱 가지 요인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를 알게 되자 나는 오랫동안 찾아 헤메던 내 우울증 – 그리고 당신의 우울증 – 을 해결할 수 있는 전혀 다른 해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때는 내게 큰 위안이 되었던 과거의 설명을 먼저 조사해야 했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어빙 커쉬는 화학적 항우울제의 셜록 홈즈에 해당합니다. 그는 오늘날 우울증과 불안증을 겪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약의 근거를 면밀하게 분석해 왔습니다. 1990년대에 그는 자신의 환자에게 화학적 항우울제를 확신을 가지고 처방했습니다. 그는 과학적 근거들을 보았고 그 결과는 확실했습니다. 논문에는 그 약을 먹은 이들의 70%가 증상이 호전되었음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더 자세하게 조사했고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제약회사들의 데이터 수집 방법을 조사했습니다. 그는 모든 종류의 유익한 효과를 찾으려 했음에도 곧 이상한 사실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셀카를 찍을 때 한 장만 찍는 사람은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수십 장을 찍은 뒤, 촛점이 맞지 않았거나 턱이 두개가 된 사진들을 제외하고 가장 잘 나온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씁니다. 제약회사들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약에 대해 거의 모든 연구를 지원한 뒤 그 많은 연구 중에 효과가 별로 없다고 나온 연구들은 모두 버리고 성공적인 연구만을 발표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실험에서 어떤 약은 245명에게 주어졌지만 제약회사는 그 중 27명의 결과만을 발표했습니다. 이 27명은 우연히 그 약이 잘 들은 이들입니다. 커쉬는 곧 70%라는 숫자가 제대로된 숫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우울증을 겪은 이들 중 65~80%가 1년 이내에 다시 우울증을 겪게 됩니다. 나는 내가 약을 먹고도 계속 우울한 이유가 내 체질이 특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커쉬는 메사추세츠 주의 사람들 다수가 나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우울증 약들은 어떤 이들에게는 효과가 있지만,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약과 무관하게 계속 우울증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당시 우리는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메뉴만 있는 메뉴판을 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메뉴판의 무언가를 없애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와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우리는 메뉴판에 새로운 메뉴를 추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커쉬는 결국 자신도 놀랄 정도의 근본적인 질문에 봉착했습니다. 바로 낮은 세로토닌 수치가 우울증을 일으킨다는 것이 얼마나 확실한 사실인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문제를 파고들었고, 이에 대한 증거가 극히 빈약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프린스턴의 앤드류 스컬은 란셋에 우울증의 원인으로 일시적으로 낮은 세로토닌을 말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며 비과학적”이라고 썼습니다. 데이비드 힐리 박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주장에는 어떤 근거도 없습니다. 그저 마케팅용 주장일 뿐입니다.”
나는 그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자신의 고통이 무엇때문인지를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내 고통을 이 올가미를 통해 어느 정도 컨트롤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그렇게 오래 믿어왔던 아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면, 나는 이 고통이 마치 고삐가 풀린 짐승처럼 나를 괴롭히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이야기의 과학적 근거는 매우 분명했고, 나는 이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가디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