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가 뽑은 올해의 국가에 한국, 프랑스
지난 2013년부터 매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이코노미스트>는 “올해의 국가”를 선정해 발표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불량 국가로 취급되는 나라들은 아무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더라도 아예 후보에 들지 못합니다. (북한은 그래서 안 되겠죠.) 그렇다고 단지 규모나 경제력만으로 나라를 뽑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매번 중국이나 미국이 1등을 도맡아 하겠죠. 그 대신 우리는 나라의 크기와 관계없이 올 한해 눈에 띄게 나아졌거나 세상을 밝힌 나라를 찾아 “올해의 국가”로 선정했습니다.
실수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2015년에 우리는 미얀마를 올해의 국가로 뽑았죠. 악명 높은 독재를 종식했고, 민주주의에 가까운 정치 체제로 성공적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평가를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그 당시에도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족에 무책임한 자세로 일관해왔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급격히 사태가 악화될 때까지 심각한 인권유린 사태를 사실상 수수방관할 줄은 몰랐습니다. 올 한해만 미얀마군의 습격과 살인, 강간, 방화를 피해 로힝야족 60만 명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난민이 됐습니다. 이웃 방글라데시가 이들을 가장 많이 수용했는데,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방글라데시를 올해의 국가로 뽑아야 하나 고민하게 됐을 정도로 문제는 심각합니다. 물론 방글라데시는 올해도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어갔으며 빈곤율을 빠르게 낮추고 있기도 합니다. 방글라데시 정부가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았거나 보수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이 다른 시민들을 겁박하려던 시도를 적절히 통제했다면 방글라데시가 올해의 국가에 뽑혔을지도 모릅니다.
아르헨티나도 후보에 있었습니다.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은 국가 재정을 다시 건전한 상태로 돌려놓고자 실로 뼈를 깎는 개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앞서 아르헨티나를 이끈 키르치네르 대통령 부부는 포퓰리즘을 바탕으로 한 무분별한 지출 위주로 경제를 운용해 참담한 실패를 맛봤습니다. 지난 10월 마크리 대통령의 여당은 중간선거 사상 가장 큰 표 차이로 승리를 거두고 더 큰 개혁 동력을 확보했습니다. 이제 아르헨티나 유권자들은 더이상 조작한 통계와 사상누각에 불과한 공짜의 유혹에 속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 선거이기도 했습니다. 이달 벌어진 시위가 폭력 사태로 치닫기도 했지만, 어쨌든 아르헨티나는 올 한해 분명히 나아졌습니다.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우리가 뽑은 올해의 국가는 한국과 프랑스입니다. 먼저 한국의 2017년은 그야말로 특별한 해였습니다. 먼저 한국은 쉴새 없이 미사일을 쏴대는 북한의 위협을 차분하고 품격 있게 견뎌냈습니다. 북한의 위협은 예전부터 늘 있던 것입니다. 북한은 지난 수십 년간 남조선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말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특히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총비서 사이에 막말과 비난, 조롱이 오가며 긴장이 고조됐습니다. 트럼프가 김정은을 “미사일에 환장한 로켓맨”이라고 부르자 북한은 트럼프를 “노망난 미제 늙은이”라고 깎아내렸습니다. 한반도 정세도 급박했지만, 한국 국내 정치 상황도 녹록지 않았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심각한 부패와 측근의 국정농단에 대한 수사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전에 없던 대규모 시위로 번졌고, 결국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당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현재 구속된 상태로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대통령 탄핵으로 치러진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사드 배치를 둘러싼 중국과의 갈등을 잘 처리했습니다. (중국은 무엇보다 미군의 레이더가 북한은 물론 중국 본토를 상시 감시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합니다.) 문 대통령은 또 트럼프 대통령의 줄기찬 한미 FTA 재협상 요구도 정중히, 그리고 현명하게 미뤘습니다. 올해 한국 사법부는 한국 최고 재벌인 삼성의 총수인 이재용 부회장을 구속했습니다. 한마디로 2017년 한국은 북한의 핵 위협이 엄존하는 가운데서도 국내 정치에 쌓인 적폐를 청산하는 데 멈춤이 없던 성공적인 한 해를 보냈습니다.
프랑스의 올 한 해도 대단히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이예즈”의 두 번째 가사처럼 마침내 영광의 날이 밝았다고도 할 수 있죠. 2017년 프랑스 유권자는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정치 경력이 일천한 은행원 출신 젊은 에마누엘 마크롱을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마크롱이 대선을 앞두고 급조한 정당 앙 마르셰(La République En Marche)에는 온통 갓 정치에 입문한 새내기들만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대선에 이어 치러진 총선에서도 앙 마르셰는 기존 정당들을 모두 완파하고 압승을 거두고 의회 다수당이 됐습니다. 이는 단지 정치적 이변 정도로 기록될 일이 아닙니다. 오래된 좌우 대립 대신 개방을 외치는 진영과 폐쇄를 부르짖는 진영의 싸움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대립 축이 형성됐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마크롱은 개방을 외치는 이들을 대표했습니다. 프랑스 밖에서 오는 사람, 상품, 사상과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어울릴 때 프랑스가 더욱 번성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집권 후 반년이 지나는 동안 마크롱 정부는 여러 의미 있는 개혁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가운데는 반부패법안과 철통같던 노동법의 일부 조항을 완화한 법안도 있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끊이지 않기는 합니다. 특히 마크롱 대통령의 당당함을 못마땅한 허세로 여기고 현실감각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이들은 마크롱 대통령의 개혁이 무늬만 개혁일 뿐 충분하지 못하다고 비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크롱이 당선되기 전의 프랑스는 그야말로 개혁의 “개” 자도 꺼내기 어려울 만큼 경직돼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래된 좌우 대립의 패러다임 아래서 유권자들의 선택지는 꽉 막힌 좌파 구호와 외국인 혐오로 무장한 극우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크롱의 정치적 도전이 앙시앙 레짐을 타도했고, 유럽연합을 사실상 해체하려 들었을 극우 민족주의자 마린 르펜의 당선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현재 지구적으로 가장 중요한 정치적 대립은 개방과 폐쇄를 둘러싼 사회적 가치의 대립일 것입니다. 프랑스는 바깥세상과의 통로를 모조리 다 닫아버리려는 세력을 물리쳤습니다. 그 점을 높이 사 우리는 프랑스를 올해의 국가로 뽑았습니다. (이코노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