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은행 내부에서 일어난 단어 전쟁
세계은행의 수석 경제학자 폴 로머가 연구 부문 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영업 부서와 연구 부서의 관계를 긴밀하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지만, 뒷이야기는 조금 다릅니다. 세계은행 내부에서 단어 하나를 놓고 전쟁이 벌어졌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죠.
문제의 발단은 로머가 세계은행 직원들의 작문 스타일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그는 보고서가 더 간략하고 읽기 좋게 쓰여야 한다며 단어 “and”의 사용을 줄이라고 지시했죠. “and”가 문서 전체에서 2.6% 이상을 차지하는 보고서는 최종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방침까지 세웠습니다. 내부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이 일었죠.
“and”를 얼마나 많이, 또는 적게 사용하는가가 좋은 글의 유일한 판단 기준은 아닙니다. 하지만 역시 이 단어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 글은 복잡해지고 눈에 질 들어오지 않죠. 세계은행의 보고서에 그런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2.6%라는 기준은 학술 작문의 세계에서 평균적인 수준입니다. 반면 이번 주 이코노미스트 인쇄판의 광고 포함 모든 글에서 “and”라는 단어의 비중은 1.5%에 불과합니다. 세계은행이 출범한 1940년대부터 세계은행의 언어 사용을 쭉 살펴본 한 연구에 따르면, 초기에 세계은행은 2.6% 기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2012년에 이르러서는 “and”가 무려 전체 단어의 6%를 차지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작문 상의 범죄”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70년대에는 보고서 상에서 3%를 차지했던 두문자어(acronym)은 이제 5%에 달하고, 전문 금융용어의 사용도 훨씬 늘어났습니다.
언어의 사용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2014년 기준, 세계은행이 발표한 문서 1611건 가운데 32%는 다운로드 건수가 0건이었죠. 보고서가 널리 읽히기를 원한다면 읽기 편한 글을 생산해야 한다는 로머의 지적이 의미있는 이유입니다. (이코노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