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선후보 마린 르펜
* 프랑스 대선은 우리나라와 달리 두 차례에 나눠 투표하는 결선 투표제로 치러집니다. 지난달 23일 1차 투표에서 앙마르슈!(En Marche!, 앞으로 행진! 이라는 뜻) 당의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와 국민전선(Front National)의 마린 르펜 후보가 결선에 진출해 오는 7일 투표를 앞두고 있습니다. BBC가 정리한 두 후보의 약력과 정책, 정치적 의미 등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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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르펜의 눈에 비친 세상
파리에 있는 마린 르펜의 집이 폭탄 테러 공격을 받은 건 르펜의 나이 불과 여덟 살 때였습니다. 르펜은 이때 정치에 눈을 떴습니다.
르펜 가족이 살던 아파트 1층에 누군가 다이너마이트 5kg을 설치해놓고 터뜨렸습니다. 폭발로 집안의 단면이 고스란히 드러날 만큼 아파트 앞면은 완전히 부서져 내렸습니다. 옆집에 살던 아기는 5층에서 떨어졌지만, 나뭇가지에 걸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아버지에 이어 국민전선(Front National)을 이끄는 마린 르펜은 자서전에서 그 날의 매캐한 화약 냄새, 널브러진 파편까지 그 날의 아비규환을 생생히 묘사했습니다.
르펜은 언니들과 함께 공포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 두려움에 손을 꼭 붙잡은 채로 덜덜 떨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다급한 목소리로 저희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죠. 얘들아, 어딨니? 살아 있는 거지? 하고요.”
1976년 11월 1일 밤, 마린 르펜의 아버지인 장 마리 르펜을 암살하려던 시도로 추정되는 이 날의 테러 공격이 누구 소행이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때는 국민전선이 출범한 지 4년밖에 되지 않은 초창기로, 프랑스 정치에서도 주변부에 머물던 신생 극우정당에는 반유대주의를 노골적으로 내세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테러 공격은 마린 르펜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바꾸어 놓았습니다. 가족이 살던 집은 산산이 조각났고, 그날 이후 학교 친구들도 르펜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학부모들은 위험천만한 인물인 장마리 르펜의 딸과 자기 자식이 어울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어린 르펜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깨달음을 하나 얻었습니다. 자신과 르펜 가족은 남들과 달라서 절대 보통 사람과 한데 묶일 수 없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남들과 다른 르펜을 동정해주며 다가오는 이들은 없었고, 하나같이 르펜을 적대시하고 멀리했습니다.
저와 우리 가족 주변에 마치 보이지 않는 투명한 울타리를 친 것 같았어요. 사람들은 르펜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고 말했죠. – 마린 르펜 –
오늘날 ‘정치인 마린 르펜’도 단단한 이미지로 그려질 때가 많습니다. 르펜의 친구이자 국민전선에서 함께 활동한 스티브 브리와는 험난한 유년기를 보낸 르펜이 자기방어 차원에서 단단한 외피를 마련해 썼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르펜을 묘사하는 단어들 가운데는 ‘깨지기 쉬운(cassant)’, ‘분열적인(clivant)’과 같이 경멸조의 표현이 특히 많습니다.
하지만 르펜이 특히 심리적으로 힘겨운 유년기를 보내며 강인한 정신력과 단호한 자존감을 키웠다는 점은 종종 잊힙니다. 르펜은 지난달 대선 1차 투표에서 1위로 결선에 오른 르펜은 오는 7일 중도 후보 에마뉘엘 마크롱과 결선 투표를 치릅니다.
르펜에게 그런 내적 강인함이 없었다면, 국민전선은 절대 지금처럼 집권을 노리는 정당으로 성장하지 못했을 겁니다. 또한, 마린 르펜의 그런 강단 덕분에 국민전선은 국민전선의 창업주라 할 수 있는 장마리 르펜과 단호히 결별하고 지금의 전국 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마린 르펜은 어떻게 국민전선을 장악했나
(관련 뉴스페퍼민트 번역: 뉴욕타임스 – 프랑스 극우정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버지와 딸의 날선 공방)
지난 2월 어느 금요일 저녁, 프랑스 동부 지방의 클레어보르락(Clairvaux-les-Lacs)이라는 작은 마을의 마을회관에서 마린 르펜은 선거 유세에 나섰습니다.
대부분 중년을 넘긴 노동자, 서민 청중 300여 명 앞에서 르펜은 국민전선 대통령 후보로 내놓은 144개 공약의 핵심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했습니다. 일자리는 프랑스 국민 먼저, 불법 체류 이민자들은 자동으로 프랑스 밖으로 추방 등 다양한 의제가 등장했습니다.
르펜은 연습으로 숙달된 톤으로 자신 있게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정치에 뛰어들기 전 르펜은 변호사로서 파리 법정에서 지금 자신이 쫓아내겠다고 지목한 이민자들을 변호했습니다.
마린 르펜은 흔히 극우 정당으로 분류되는 국민전선을 올해로 6년째 이끌고 있습니다. 마린 르펜의 대선 도전은 18%를 득표해 1차 투표에서 3위를 기록했던 지난 2012년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2012년 도전에서 이미 마린 르펜은 아버지 장 마리 르펜보다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장마리 르펜은 2002년 반이민 정서, 법과 질서를 전면에 내세우며 결선 투표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지만, 프랑스 유권자들이 극우 정당에 반대해 대대적으로 결집하며 자크 시라크 대통령에게 결선 투표에서 완패했습니다.
마린 르펜은 아버지가 이룩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린 르펜의 행보를 차분히 지켜보면 유권자들이 왜 르펜을 지지하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 르펜은 유권자들이 바라는 다양한 역할을 대단히 매끄럽게 척척 해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르펜을 푸근하면서도 진솔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르펜은 일할 땐 열심히 일하고, 즐길 때는 즐길 줄 아는 평범하면서도 근면성실한 ‘모범 시민’의 이미지를 심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몇 년째 정치를 하면서 이민 반대, 유럽연합 반대라는 정책의 기조 자체는 한 번도 바뀌지 않고 꾸준히 유지됐습니다.
특히 파리가 아닌 지방 유권자들은 마린 르펜이 파리 기성 정치권과 기득권층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정치인이라는 점을 오히려 마음에 들어 합니다.
아버지 장마리 르펜이 없었다면 국민전선도 없었을 겁니다. 마린 르펜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건 극우 정당 국민전선뿐이 아닙니다. 마린 르펜의 호전적인 성미도 아버지 장마리 르펜을 닮았다는 평이 많습니다.
체면 차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내뱉는 농담을 프랑스어로 ‘la gouaille’라고 하는데, 이 점도 마린 르펜은 아버지 장마리 르펜과 닮았습니다. 르펜은 연설 중 청중의 환호를 끌어내고자 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다음 두 가지는 반드시 돌려드리겠다고 약속드려요. 여러분의 의견이 정치에 반영될 수 있도록 여러분의 목소리를 찾아드릴 거고요, 그리고 여러분의 떼인 돈도 제가 받아드리겠습니다! – 마린 르펜 –
아버지와 딸은 외모도 물론 닮은꼴입니다. 강한 인상과 금발 머리카락까지. 마린 르펜은 장마리 르펜의 세 딸 가운데 막내입니다. 아들을 바라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일 겁니다.
마린 르펜의 어머니 피에레뜨는 막내딸이 머리만 긴 장마리 르펜이라며 아빠를 꼭 빼다 박았다고 말합니다. 막말을 일삼는 전통적인 극우 정치인답게 장마리 르펜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막내딸 마린은 그냥 제 아바타죠. 가슴 달린 장마리 르펜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현재 마린 르펜은 아버지 장마리 르펜과 잘 알려졌듯 완전히 척을 졌습니다. 처음에는 마린 르펜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이루고자 일부러 아버지와 거리를 두며 불화를 조장했다는 설도 있었지만, 둘 사이는 한 마디로 남보다도 못한 원수지간이 돼 버렸습니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는 적어도 지난 2년간 아무런 왕래가 없었습니다. 르펜 가문에 관한 책을 쓴 올리비에 보몽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르펜 집안에서는 정치가 혈연보다 우선이죠. 장마리 르펜은 자신이 손수 만들어 40년간 끌고 온 정당을 아무리 딸이라도 다른 사람이 장악하는 것을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던 겁니다.”
(부녀간의 다툼은) 마치 그리스 비극처럼 전개됐다. 그리고 그 결말도 비극적인 존속살인으로 맺는 그리스 비극의 레퍼토리를 따랐다. 물론 정치적 축출이라는 상징적인 살인이었지만. – 올리비에 보몽 기자 –
마린 르펜의 친한 친구 장린 라카펠은 마린 르펜이 대단한 일을 했다고 추켜세웁니다.
“자신의 정치 이력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프랑스 전체를 위해서도 마린은 정말 어려운 일을 해낸 겁니다. 아버지와 연을 끊었으니까요.”
르펜 부녀는 2015년 4월 장마리 르펜의 한 라디오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갈라섰습니다. 이날 인터뷰에서 장마리 르펜은 딸 마린 르펜이 오랫동안 아버지가 입 밖에 낼까 걱정하던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사소한 부분(le détail)’이란 말을 수차례 번복한 겁니다.
국민전선 당직자나 당원들에게 ‘사소한 부분’의 사 자만 언급해도 이들의 표정이 단박에 굳는 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이들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정확히 알고 있고, 그런 만큼 이 문제가 언급되는 걸 꺼리죠. 국민전선 흑역사의 기원은 1987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장마리 르펜이 한 인터뷰에서 홀로코스트를 간접적으로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한 거죠. 장마리 르펜 자서전 작가들은 이날을 “르펜이 극우 정치인 르펜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날”이라고 부릅니다.
이날 인터뷰에서 장마리 르펜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의견에 동조하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 답변은 르펜의 입에서 나온 말들 가운데 여러모로 최악으로 꼽을 만합니다.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가스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스실을 본 적이 없고, 제가 따로 그 문제를 연구해본 적도 없으니 저는 모르죠. 다만 저는 이 문제가 세계 2차대전의 광범위한 역사 전체에서 놓고 보면, 극히 ‘사소한 부분’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장마리 르펜을 향한 전국적인, 전 세계적인 비난이 쏟아졌지만, 르펜은 홀로코스트를 별것 아닌 문제로 치부하는 태도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르펜의 정적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공격 거리가 없었습니다. 국민전선이 아직도 반유대주의, 인종차별 정당이라고 비난받는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은 장마리 르펜이었습니다.
장마리 르펜은 혐오 발언 죄로 잇따라 벌금형을 선고받고 말 그대로 공공의 적으로 전락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뜻을 꺾지 않고, 오히려 잊을 만하면 화를 더 키우는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그는 이 문제로만 법원에서 총 15차례 유죄 선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2015년 인터뷰에서 또 한 번 ‘사소한 부분’에 관해 이제는 익숙한 질문과 답변이 되풀이된 겁니다. 아버지의 ‘망언’을 참담한 심정으로 지켜본 마린 르펜은 마침내 해당 발언과 공식적으로 선을 긋습니다.
아버지 아래서 정치에 입문하고 몇 년간 곁에서 아버지와 국민전선을 지켜본 마린 르펜은 아버지는 절대 선거에서 이기지 못하리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어쩌면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서 더 문제였는지도 모릅니다.
2002년 마린 르펜은 아버지가 1차 투표에서 뜻밖의 선전을 펼치는 모습에 크게 고무됐습니다. 하지만 결선 투표에서 ‘르펜만은 안 된다’는 기치 아래 거의 모든 프랑스 국민이 똘똘 뭉치는 모습을 보고 받은 충격이 훨씬 오래 뇌리에 남았습니다.
장마리 르펜의 결선 투표 득표율은 17.8%로, 82.2%를 득표한 시라크 대통령에게 완패한 것도 충격이지만, 무엇보다 1차 투표에서 얻은 표보다 거의 한 표도 더 얻지 못했다는 점이 마린 르펜에겐 더 충격이었습니다. 1차 투표에서 누구를 찍었든, 르펜만은 안 된다는 데 국민전선 지지자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인이 동의했던 겁니다.
장마리 르펜은 2007년 대선 1차 투표에서 10.4%를 득표해 4위로 고배를 마셨습니다. 르펜의 내림세는 되돌리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어쩌면 장마리 르펜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그저 하고 싶은 말이나 원 없이 해대는 데서 찾았는지도 모릅니다. 하는 말마다 불쾌한 헛소리지만, 그저 노망 난 늙은이의 막말로 치부하고 넘기면 그만인 그런 사람 취급을 받아도 장마리 르펜 본인은 개의치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2011년 국민전선 당수 선거에서 승리한 마린 르펜은 당을 ‘정상화’하고, 무엇보다 수권 능력을 갖춘 전국 정당으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여러 차례 분명히 밝혔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신문의 일면을 장식한 건 마린 르펜이 주창한 새로운 당의 비전이 아니라 장마리 르펜이 내던진 부적절한 발언들이었습니다.
2015년 ‘사소한 부분’에 관한 변치 않는 고집을 재확인한 라디오 인터뷰 이후, 마침내 장마리 르펜의 당원 자격은 박탈됐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국민전선의 명예회장직을 유지하고 있지만, 장마리 르펜은 더 이상 국민전선 당원이 아니었습니다.
르펜 가족의 ‘막장 드라마’는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마린 르펜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완고한 고집, 호전적인 성향, 물러서지 않는 끈질긴 승부욕을 발휘해 아버지를 당에서 내칩니다.
당의 정상화
이제 국민전선은 완전히 마린 르펜의 당이 됐습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르펜 본인 말고도 선거 캠프 참모들과 가족들의 지지도 중요해졌습니다. 플로리앙 필리포, 니콜라 바이, 데비드 라슐린 등 참모들과 르펜의 동거인 루이 알리오 등 많은 사람이 다른 정당에서 하는 것처럼 똑같이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후보를 측면에서 지원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진지한 태도로 열심히 연습하고 준비한 뒤 유세와 방송에 임했습니다.
르펜의 핵심 참모 가운데 한 명인 플로리앙 필리포는 마린 르펜의 이름을 따 마린 카페(Marine cafe)라 부르는 사무실 주방에서 진행하는 정치 토크쇼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립니다. 주로 르펜의 정치적 의제와 상통하는 내용을 다루는데, 최근의 공장 해외 이전을 비난하거나 유럽연합이 주도한 자유무역 협상을 비난하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주요 프랑스 매체들은 오랫동안 국민전선이 견지한 극우 성향의 시각을 사회에 마냥 해로운 것으로 취급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대선 1차 투표에서 어엿한 최고 득표율을 기록한 후보를 낸 정당이 된 만큼 더는 국민전선을 무시할 수 없게 됐습니다. 엘리자베스 레비 기자는 몇 년 전 처음으로 마린 르펜을 인터뷰했을 때 받은 느낌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습니다.
“한 마디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죠.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달까요?”
그렇다면 국민전선은 이제 제도권 내로 들어온 정당이라고 봐야 할까요?
국민전선 지지자들은 일종의 ‘퇴마 의식(dédiabolisation)’을 꾸준히 해온 결과 이제 당이 거의 정상화됐다고 말할 겁니다. 사람들도 정상적인 모습을 갖췄다는 지적에 대체로 동의합니다.
2차대전 당시 나치에 부역했던 비시 정권을 옹호하거나 파시즘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며 알제리를 식민 지배했던 역사를 찬양하는 이들은 이제 거의 자취를 감췄습니다.
인종차별 발언은 당규 위반이며, 이를 조장하는 사람은 당의 제명 조치를 피할 수 없습니다. 2010년, 당 지도부 선거에 나서기 전 마린 르펜은 무슬림이 길을 걷다가도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종교 행위를 나치 독일 치하에 비유했다가 당 안팎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르펜은 이후 여러 차례 무슬림과 프랑스 민주주의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분명 톤을 부드럽게 바꾼 겁니다. 국민전선은 유대인 공동체에도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독일, 네덜란드를 비롯한 여러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 잇따라 국수주의 정당이 득세했습니다. 이제 국민전선은 프랑스에만 있는 독특한 현상이 아니라, 전 유럽, 전 세계적인 현상에 가까워졌습니다.
국민전선에 유리한 사건도 잇따라 일어났습니다.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이 파리와 니스에서 일으킨 테러가 그랬고, 유럽연합 엘리트를 향한 유럽 시민들의 실망은 프랑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프랑스 대중들의 기성 정치권을 향한 전반적인 환멸과 함께 프랑스의 경제적, 사회적 위상이 추락한다는 이른바 국격 저하(le déclassement)에 대한 두려움도 커졌습니다. 한마디로 프랑스인은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신문 로피뇽(L’Opinion)의 국민전선 출입 기자 베아트리스 우샤르는 국민전선도 다른 정당과 똑같은 잣대로 다룬다고 말합니다. 국민전선에 특별히 우호적인 기사를 쓰지 않지만, 반대로 무조건 비판적인 기삿거리를 찾아 보도하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정상적인’ 정당 취급을 받게 된 국민전선은 선거에서도 잇단 성공을 거둡니다. 지방선거와 유럽 의회 선거에서 연이어 승리하자, 마린 르펜은 이제 어엿한 지지율 1위 정당의 당 대표라고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국민전선이 감히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정신 나갔다는 비아냥을 들을 법한 일이었습니다.
국민전선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당입니다. 국민전선은 노동자 계급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받습니다. 국민전선은 농민들이 가장 지지하는 정당입니다. – 장린 라카펠 –
마린 르펜의 절친이기도 한 라카펠은 이밖에도 공무원 중에 국민전선 지지자가 빠르게 늘어난다는 점도 고무적이라고 말합니다.
“경찰과 군인들이 그렇고, 중소 자영업자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지지율이 오르고 있어요. 이제 국민전선은 특정 계급이나 지역을 대표하는 정당을 넘어 어엿한 전국 정당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다만 다른 나라의 국수주의 정당과 달리 국민전선은 65세 이상 노년층에서 인기가 높지 않은 편입니다. 또한, 당이 극우 색채를 완전히 걷어내고 정상화했다고 하기에는 여전히 국민전선이란 이름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가 짙습니다. 국민전선이란 당명과 르펜이라는 이름이 불러내는 선입관 때문일까요?
사실 국민전선을 경계하는 이들은 여전히 당의 핵심 정체성은 바뀐 게 없다고 비판합니다. 좌파 성향으로 분류되는 일간지 리베라시옹의 편집인 로랑 조프랭은 국민전선이 여전히 ‘우리’ 프랑스인을 우선시하고, 외부인을 배척하는 점에서는 변한 게 없다고 지적합니다.
오늘날 무슬림을 향한 국민전선의 암묵적인 비난은 과거 이들이 유대인을 향해 하던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 로랑 조프랭, 리베라시옹 편집인 –
“이 사람들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프랑스의 통합에 걸림돌이라는 레토릭은 마찬가지예요.”
정상적인 정당의 범주로 들어왔다는 오늘날의 국민전선을 향해서는 솔직하지 않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극단적인 편견을 버리지 않은 ‘올드 보이’들이 여전히 당의 중추를 이루고 있으며 당원들도 사적인 장소에서는 훨씬 극단적인 견해를 서슴없이 드러내면서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그렇지 않은 척하고 계속해서 편견을 퍼뜨린다는 겁니다.
1965년부터 반세기 넘게 프랑스 대선을 보도해 온 언론인 알랭 뒤아멜도 국민전선이 여전히 간접적으로 무슬림을 공격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마린 르펜이 공공장소에서 종교 색채가 드러나는 의상을 착용하거나 종교적 표식을 금지해야 한다는 의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한 것은 간접적으로 반이민 정서를 부추기는 전략이었다고 두아멜은 분석합니다. 르펜이 마음속에 두고 있는 ‘종교적 상징물’이란 무슬림 여성의 히잡이지 기독교인들이 차고 다니는 십자가 목걸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레제코(Les Echos) 신문의 세실 코르누데 기자는 반이슬람 정서는 특히 노동자 계급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마린 르펜은 이에 교묘히 편승해 정교분리 원칙(laïcité)과 여성 인권을 들먹이며 반이슬람 정서를 퍼뜨리고 있는 겁니다.
과거 GUD라 불리는 극우 무장 테러단체에 몸담았던 이들이 아직 마린 르펜의 참모로 일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무슬림 공동체는 전반적으로 르펜을 불신합니다. 모로코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25살 의류 디자이너 이만 메스타우이 씨는 마린 르펜은 그저 아버지 장마리 르펜을 거칠지 않게 잘 다듬어놓은 정치인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르펜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건 변함 없어요. 다만 마린 르펜은 그 점을 더 능숙하게 숨길 뿐이죠. 짐짓 아닌 척하며 오히려 이슬람교를 향한 두려움을 더 조장하는 마린 르펜이 무슬림 공동체에는 훨씬 끔찍한 존재예요.”
다만 “마린 르펜도 알고 보면 똑같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식의 주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누군가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은 의견이 없다고 수차례 밝히는데도 “말만 그렇게 하지 사실 속으로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안다.”는 태도로 넘겨짚고 몰아세우는 데도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이렇게 누가 어떤 생각을 한다고 공개적으로 혐의를 씌운 뒤 생각을 검증하자고 하는 일종의 사상 몰이를 ‘procès d’intention’이라고 부릅니다.
국민전선 지지자 가운데는 기성 정치권에 퍼져 있는 ‘국민전선을 찍는 사람은 미개한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식의 인식에 더욱 격하게 반발해 마음을 돌린 사람도 있습니다.
마린 르펜에 관해서는 르펜의 정적들조차 거의 아무도 그녀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마린 르펜은 누구인가?
르펜 가족은 1976년 폭탄 테러 이후 파리 서쪽 외곽 몽트레투 지역의 센느강 북쪽으로 난 작은 언덕에 자리한 외부인 출입 제한 주택지에 있는 19세기 중반 스타일의 3층짜리 건물로 이사했습니다. 비슷한 풍의 이웃집 몇 채를 지나 사설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길의 마지막에 작은 정원을 끼고 서 있는 건물로, 장마리 르펜이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한 시멘트업체 사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집입니다.
시멘트업체 사장의 동생이 형이 사망한 뒤 르펜에게 집을 기증한 적 없다고 주장하는 등 뒷말이 무성했지만, 결국 이 집은 르펜 가문의 정치사를 설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공간이 됩니다.
“아주 상징적인 건물이죠. 파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금 떨어진 곳의 언덕 위에 외로이 자리 잡은 집은 어떤 면에서 장마리 르펜 본인을 닮았어요. 르펜은 항상 체제 밖에서 체제를 비판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올리비에 보몽 기자의 말입니다. 보몽 기자가 르펜에 관해 쓴 책의 제목은 “몽트레투의 지옥에서”입니다.
오싹할 만큼 소름 끼치는 건물이기도 해요. 미치광이가 사는 집 같기도 하고요. 그런 점 역시 장마리 르펜과 어울리는데, 르펜은 항상 기득권 정치인을 여러 의미에서 소름 돋게 했으니까요. – 올리비에 보몽 기자 –
이 집은 오늘날까지 르펜 가문의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마린 르펜은 40대가 될 때까지 몽트레투에 있는 단층집에 살았습니다. 그러다 2014년 여름 마침내 이곳을 떠났는데, 당시 아버지 장마리 르펜과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입니다. 익명을 요구한 마린 르펜의 한 측근은 부녀의 냉랭했던 분위기를 전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제가 봤던 걸 말씀드려도 아마 못 믿으실 걸요? 르펜 부녀는 고작 100m 떨어진 곳에 살면서도 절대 마주치려 하지도 않았어요. 할 말이 있어도 누군가를 통해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식이었죠. 통속극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었다니까요.”
이야기의 최고 절정 또한 더 상징적이고 극적일 수 없는 일입니다. 장마리 르펜이 키우는 개가 마린 르펜이 사랑하던 고양이 아르테미스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죠.
입버릇처럼 언젠가 기회가 되면 진지하게 고양이 보호시설을 열고 싶다고 말하던 마린 르펜에게 이 사건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현재 몽트레투의 집에는 장마리 르펜의 둘째 딸이자 마린 르펜의 언니인 얀 르펜이 2층에 살고 있습니다. 얀 르펜의 딸은 국민전선의 또 다른 스타 정치인 마리옹 마레샬 르펜입니다.
장마리 르펜의 큰딸 마리카롤린 르펜은 마린 르펜처럼 오래전에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져 다른 곳에 살고 있습니다. 부녀는 벌써 15년 전인 2002년에 크게 다툰 이후 사실상 부모·자식의 연을 끊고 지내 왔습니다.
장마리 르펜은 더는 이 집에 살지 않지만, 매일 건물 1층에 있는 집무실로 출근합니다. (마린 르펜이 살던) 단층집에는 르펜 삼 자매의 어머니이자 장마리 르펜의 전 부인인 피에레뜨가 살고 있습니다.
1984년 부부가 결별할 때 피에레뜨는 장마리 르펜에게 악의 화신이라고 욕설을 퍼부은 뒤 복수의 의미로 플레이보이 지에 누드 화보를 찍기도 했습니다. 당시 16살이었던 마린 르펜에게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별거와 이혼은 이후 평생 트라우마로 남습니다. 피에레뜨는 딸들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집을 나갔고, 마린 르펜은 이후 15년 동안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마린 르펜은 자서전 <파도를 거슬러(A contre flots)>에 당시의 힘겨웠던 나날을 회상합니다.
“한 달 반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토했다. 뭐라도 먹으려 하면 내 몸이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너무나 끔찍하고, 잔혹하리만큼 견디기 힘든 아픔이었다.”
마린 르펜의 유달리 강인한 정신력은 어렸을 때 폭탄 테러뿐 아니라 바로 이때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르펜은 어떤 상황이 와도 헤쳐나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장마리 르펜은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항상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해. 잊지 마라. 한겨울 전쟁통에 알몸으로 어딘가에 버려질 수도 있어. 그래도 넌 살아남아야 한다.”
르펜 가의 자식으로 사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았습니다. 자서전에서 마린 르펜은 학교에서 왕따가 된 이야기, 선생님은 물론 성당 신부님들조차 장마리 르펜을 극렬히 혐오한다며 학생이자 청소년인 마린 르펜을 외면했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놓습니다.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뒤에도 마린 르펜이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장마리 르펜이 펼치는 극우 정치는 혐오 범죄라고 생각한 프랑스인 누구도 르펜 가문의 일원을 변호사로 쓰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린 르펜에게 허락된 일자리는 국민전선 자문 변호사 자리뿐이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며 마린 르펜은 자신을 향한 부당한 차별과 비난을 분명히 인지하게 됩니다. 다른 정치인이나 언론은 아버지 장마리 르펜을 악마, 괴물, 쓰레기로 묘사했지만, 그녀는 대신 장마리 르펜의 딸로서가 아니라 마린 르펜의 정치를 하기 시작합니다. 마린 르펜의 조카 마리옹 마레샬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르펜이란 이름으로 태어난 순간 정치에 어떤 식으로든 발을 담그는 운명은 피할 수 없어요. 다른 이름도 아니고 르펜인걸요. 무얼 했더라도 결국에는 정치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예요.”
마린 르펜의 남다른 독립심도 몽트레투에서 보낸 어린 시절 덕분이라는 점은 많은 사람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장마리 르펜 부부가 전형적인 부르주아 계급의 부모 역할을 했으리라는 세간의 추측과 전혀 달리 당시 이들은 자녀 교육에 거의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부부는 장마리 르펜의 정치 후견인들을 만나며 매일같이 저녁식사와 파티에 불려 다녔고, 집에 남은 세 자매는 부모님 얼굴을 보지 못하며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보냈습니다. 지역 공립 학교에 다닌 마린 르펜은 학교에서 68혁명이 일어났 던 1968년에 태어난 동년배들과 어울렸습니다.
마린 르펜은 얼마나 극우일까?
68혁명은 프랑스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1968년, 파리의 학생들은 고집불통인 샤를 드골 대통령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드골을 끌어내리지는 못했지만, 68혁명은 프랑스 사회를 대대적으로 바꿨습니다. 68혁명에 우호적인 이들에게는 똘레랑스가 높아지고 다양성이 더 존중되는 사회로의 변화였습니다. 반대로 68혁명을 마뜩잖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에게 1968년은 좌파들이 문화 헤게모니를 잡고 프랑스의 가치를 독점하기 시작한 해로 기억됩니다.
마린 르펜은 국수주의자입니다. 이민에 반대하고, 온갖 사회 문제의 원인으로 이민자를 꼽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마린 르펜이 내세우는 극우 사상이라는 것은 아버지 세대 때의 극우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리베라시옹의 로랑 조프랭은 마린 르펜의 시각을 여기저기 두루 걸쳐 있는 기회주의적 국수주의라고 설명합니다.
“원래 국수주의자들이 그렇기는 합니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정당화되고 다 옳은 것이 되죠.”
2005년 자서전에서 르펜은 주당 35시간 근무제에 분명히 반대했지만, 지금은 찬성합니다. 퇴직 연령을 60세로 못 박자는 국민전선의 공약은 극좌파들의 공약과도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일 정도입니다. 1968년을 전후로 태어난 마린 르펜의 동년배들과 비교해 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익명을 요구한 르펜의 전 참모 한 명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르펜의 반응은 분명 좌파의 반응이었어요. 마린 르펜 곁에서 일하면서 발견한 분명한 점은 르펜은 우파식으로 반응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제가 말하는 좌파, 우파의 반응이란 우파는 항상 평등(equality)보다 자유(liberty)가 더 중요하고, 좌파는 반대죠. 그런데 마린 르펜에겐 항상 평등이 자유보다 더 중요했어요.”
- 국민전선 정책
- 유럽연합 잔류 여부 국민투표 부친 뒤 유럽과 재협상
- 경찰 1만5천 명 증원, 교도소 4만 개소 신설
- 주당 35시간 노동, 퇴직 연령 60세로
- 연간 이민자 1만 명까지만 수용
- 불법 체류 이민자 자동 강제 추방
- 공공주택 보급에 프랑스 국적 시민 우선권 부여
특히 사회 문제에 있어서 르펜은 전통적인 극우 정치와 완전히 다른 노선을 걷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르펜은 보수주의자들 수백만 명이 2013년 거리로 몰려나와 동성혼 금지를 외쳤을 때 이를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르펜 참모들 가운데는 동성애자들도 플로리앙 필리포를 비롯해 동성애자도 여럿 있습니다. 장마리 르펜을 오랫동안 보좌한 개인 비서도 게이였습니다.
많이 양보해서 르펜이 종교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르펜은 자신의 책에서 가톨릭 교리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건 한심하다고 폄훼하기도 했습니다. 가톨릭에서 금지하는 이혼을 두 차례나 했고, 가톨릭에서 금지하는 낙태는 필요악으로 여기지만 어쨌든 낙태를 결정할 권리는 여성에게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몽트레투가 낳은 또 다른 정치인 마리옹 마레샬 르펜은 낙태에 관한 한 이모 마린 르펜과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1990년생인 마리옹 마레샬 르펜은 가톨릭 원칙을 중시하며 가족 중심, 낙태 반대의 보수적 가치를 설파하는 단체 상코뮌(Sens Commun)의 대변인 마들렝 드 제시와 절친한 사이이기도 합니다.
마리옹 마레샬 르펜은 마린 르펜을 두 번째 엄마나 다름없다며 이모 이상으로 따르고 존경한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끈끈한 가족의 연으로 이어졌다지만, 둘의 정치적 견해는 상당히 다릅니다. 마리옹은 단적으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반(反) 68혁명 세대 출신이에요. 저희 세대는 1968년 학생운동 진영이 이데올로기를 해체했던 데 대체로 반감을 품어요. 지금 우리에겐 어떠한 원칙과 가치, 우리를 이끌어줄 무언가가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통째로 부정했던 게 68혁명 정신이에요. 이모가 보낸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사춘기까지 68혁명의 열기로 가득했어요. 지금은 달라도 한참 달라졌죠. 또다시 세월이 흘렀으니까요.”
장마리 르펜과의 관계도 이모와 조카가 크게 다른 점입니다. 부녀지간의 연을 끊은 마린 르펜과 달리 마리옹 마레샬 르펜은 외할아버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원만한 관계를 넘어 정치적으로도 무척 가까운 사이입니다.
장마리 르펜의 길
장마리 르펜은 올해 우리 나이로 90세입니다. 한창때보다 거동이 훨씬 자유롭지 못하고, 청력도 예전 같지 않아 잘 못 듣는 말이 많아졌습니다. 그렇지만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내뿜는 거친 언변과 걸걸한 웃음은 예전 그대로입니다. 장마리 르펜은 우파 젊은이들이 부모 세대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라고 말합니다.
몽트레투에 있는 르펜의 집 1층 집무실에는 러시아 아이콘과 우주선 모형, 장교 제복을 입고 있는 젊은 시절 르펜의 사진, 안대, 동쪽으로 수도 파리를 바라보게 놓아둔 커다란 쌍안경까지 장마리 르펜의 일생을 기념할 만한 물건으로 가득합니다.
르펜이 살아온 궤적 곳곳에 중요한 주제로 바다가 등장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장마리 르펜은 프랑스에 처음으로 더플코트를 들여왔습니다. 르펜은 1950년대 초 영불해협에서 펼쳐진 요트 시합에 참여한 뒤 영국 플리머스에 있는 군용물자 용품점에서 2파운드에 더플코트를 한 벌 삽니다. 당시 파리 사람들은 르펜이 가져온 더플코트의 디자인을 마냥 신기해했습니다.
그는 딸 마린 르펜에 관해서라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얼굴도 보지 않을 만큼 사이가 틀어졌는데도 여전히 딸의 성공을 응원하고 있을까요?
“그 아이가 날 내치지 않았다면 지금 얼마나 더 큰 성공을 거뒀을지 그걸 한 번 생각해보쇼! 지금 걔 지지율이 27%란 말이요, 내가 있었다면 35%는 족히 나왔을걸? 아마 나를 단호히 내침으로써 기존 정치권에 무언가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던 거겠지. 하지만 여전히 프랑스에서 나 장마리 르펜만이 대변할 수 있는 가치라는 게 있단 말이오. 마린이 나를 다시 불러만 준다면 나는 우파와 극우를 아우르는 확실한 개혁 의제는 물론 이를 중심으로 모여 있지만 마린 르펜에게서는 떨어져 나간 수많은 표를 몰고 다시 국민전선으로 들어갈 용의가 있소.”
내 딸 마린은 지금 내가 40년간 피땀 흘려 가꾼 밭에서 난 작물을 수확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 장마리 르펜 –
장마리 르펜은 국민전선을 이 지경으로 망쳐 놓은 장본인으로 마린 르펜의 최측근 플로리앙 필리포를 꼽았습니다.
필리포는 마린 르펜의 절친한 친구이자 보좌관, 국민전선의 2인자로 그랑제꼴 가운데서도 프랑스 관료와 정치인 대부분을 배출한 국립행정학교(É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 ENA) 출신입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필리포가 국수주의자 가운데서는 중도에 가까운 성향이라는 점일지도 모릅니다.
국민전선이 노동자 계급을 보호한다는 정책을 낸 건 필리포의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장마리 르펜은 당연히 여기에 반대합니다.
“필리포 같은 사람이 그렇게 큰 영향력을 갖고, 당의 메시지를 독점하는 건 정말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겁니다.”
그래도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하는 장마리 르펜은 꽤 행복해 보였습니다. 반골 기질을 타고 난 장마리 르펜은 아마 자기 자신을 기득권의 온갖 위선을 다 까발리는 영웅으로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장마리 르펜이 걸어온 격정적인 정치인의 삶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시작됩니다. 당시 르펜은 프랑스를 해방시킨 영웅 샤를 드골 장군과 공산주의자들의 이야기로 도배된 해방 공간이 심각하게 왜곡됐다고 느낍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수에즈, 그리고 알제리에서 제국주의 프랑스의 마지막 남은 전쟁터에서 싸운 뒤 퇴역한 르펜은 가게 주인 출신의 포퓰리스트 정치인 피에르 푸자드의 정당의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합니다. 고령에도 유럽 의회 현역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마리 르펜이지만, 당시 프랑스 국회의원 장마리 르펜은 유럽연합의 초석이 된 1957년 로마 조약에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유럽연합이란 르펜에게 엄청난 배신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배신은 알제리 독립이었습니다.
알제리의 끈질긴 독립 요구에 드골 대통령은 마침내 프랑스가 식민지 알제리를 포기한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알제리가 독립한 뒤 알제리에 살던 유럽인(대부분 프랑스인, pieds noirs)이 대거 프랑스로 돌아옵니다.
르펜은 자신이 무조건 외국인 혐오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고 강조할 때면 1956년 수에즈 전쟁에 참전했을 때 전사한 이집트 군인에게 최대한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줬다는 일화를 꺼내곤 합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사소한 부분’ 문제는 어떻게 설명하시겠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사소한 부분 얘기, 왜 안 나오나 했수. 자, 첫 번째 문제가 된 게 1987년, 그다음이 2015년이었소. 내가 뭐 맨날 그렇게 말한 것도 아닌데, 참 나, 게다가 지금까지 내가 알기로는 내 말에 제대로 근거를 대며 반박한 사람도 한 명도 없더구먼 뭘.”
나는 (유대인 포로수용소) 가스실의 존재가 2차대전 역사의 일부분이라고 말한 것뿐이다. 아무리 봐도 틀린 말은 아니다. – 장마리 르펜 –
문제는 장마리 르펜이 가스실과 집단 학살을 하찮은 문제로 취급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 부분을 자세히 묻자 장마리 르펜은 즉답을 피했습니다.
“아이고 존경하는 기자님, 어떤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말 몇 마디로 재단하고 판단하면 그게 전제 정치고 독재 아니겠습니까?”
그럼 두 딸과 사이가 소원해진 건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 질문에 장마리 르펜은 이번에도 “mon cher monsieur”라고 말하며 답변을 시작했습니다.
“원래 인생이 그런거잖수! 다 그래요, 다. 물결 하나 없는 고요한 호숫가에서 노 젓는 일인 줄 아우? 급물살에 폭포도 지나고 암초도 만나고 하는 거요! 난 원래 날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골이 난 사람이오. (정치를 시작하고) 60년 동안 난 항상 물살을 거슬러 올라갔소. 역풍을 헤치고만 가봤지, 편안한 지지 받으면서 순풍에 돛 달고 가본 적이 없다고! 욕설이든 비난이든 이 한 몸에 다 받아내며 왔지. 한 마디로 평온한 삶, 이런 게 나랑 거리가 가장 먼 말이라오.”
여기까지 말하고 노 정치인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프랑스 유권자의 마음을 얻는 길
대선 후보 지지율 1위가 되기까지 마린 르펜이 걸어온 길이라고 항상 순탄했던 건 절대 아닙니다. <파도를 거슬러>라는 자서전 이름만큼이나 르펜은 항상 마파람을 이겨내고 악착같이 여기까지 올라온 인물입니다. 브르타뉴 지방의 어부였던 장마리 르펜의 아버지, 그러니까 마린 르펜의 할아버지는 타고 있던 배가 독일군 지뢰를 건드려 전복돼 익사했습니다.
장마리 르펜과 마린 르펜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장마리 르펜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움 그 자체를 즐기는 반면, 마린 르펜은 치밀하게 계산하고 철저히 준비해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택하는 편이라는 겁니다.
대통령은 꿈도 못 꿀 극우 소수정당 시절, 국민전선의 의회 진출을 가로막은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소선거구제 선거 제도였습니다. 1986~88년에 잠시 비례대표제가 도입됐지만, 이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국민전선은 많아야 국회의원 한두 명을 내는 정당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다 마린 르펜이 당을 이끌기 시작한 뒤 변화가 찾아옵니다.
국민전선 소속 프랑스 국회의원은 여전히 두 명에 불과하지만, 유럽연합의 대의 기구인 유럽 의회와 프랑스 지방 선거에서는 선전을 거듭했습니다. 현재 국민전선 소속 기초자치단체장이 11명이나 됩니다. 국민전선이 득세하는 지역은 흥미롭게도 프랑스 최북단과 최남단 두 곳입니다. 두 곳의 지지 성향을 보면 각기 다른 이유로 국민전선이 선택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국민전선의 북부 근거지
릴 남쪽에 위치한 도시 에넹보몽(Henin-Beaumont)에서 2014년 시장에 당선된 스티브 브리와는 마린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과거 석탄이 많이 쓰일 때 잘 나가던 탄광촌의 호황은 기억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됐고, 샘소나이트 가방과 금속 제품을 만드는 공장이 있었지만, 이 또한 오래전에 해외로 이전했습니다.
시내 중심부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물은 내부를 다시 꾸미고 있는 대형 교회 건물. 음식을 사 먹을 만한 식당이라고는 중동 음식을 파는 가게 하나 정도가 눈에 보이고 거리에는 온통 부랑자밖에 없습니다.
이곳은 전통적인 좌파의 텃밭이었습니다. 에넹보몽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사회당이 60%, 공산당이 20% 정도를 득표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시장 집무실에도 20세기 사회주의자 장 조레의 흉상이 있습니다. 국민전선은 좌파가 오랫동안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준 지역구와 유권자를 배신했다고 공격했습니다.
오늘날 국민전선이 과거 프랑스 공산당에게 가던 표를 흡수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1950년대만 해도 특히 농촌 지방에서 공산당의 인기가 높았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25% 이상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은 마침내 제도권 정치 안에서 소멸하고 말았습니다.
장마리 르펜은 “공산주의자들은 사실 훌륭한 애국자였는데, 자기들만 그 사실을 몰랐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한때 공산당에 표를 주던 에넹보몽의 노동자 계급 유권자들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국민전선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가치, 교육, 산업과 일자리 보호, 세계화와 금융 자본주의 비난을 비롯한 국민전선의 주장 대부분은 대체로 환영받습니다. 브리와 시장도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공산주의를 싫어하죠. 하지만 1950년대 프랑스 공산당에는 애국자들이 넘쳤습니다. 그때 포스터들만 봐도 알 수 있죠. ‘프랑스 제품’, ‘프랑스식을 유지하자’처럼 지금 제게도 어필하는 구호가 많아요.”
부드러운 성격의 브리와 시장은 인기가 많습니다.
“오랫동안 우리 시장들도 대부분 엘리트였습니다. 시청을 자기가 받은 온갖 학위에 자격증으로 수놓곤 했죠. 끔찍한 일입니다. 저는 반대로 그런 면에선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대신 시정만큼은 최선을 다해서 괜찮게 해내고 있어요. 공무원들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멍청하고 일을 못 하지는 않거든요.”
시청 앞 광장에서 만난 사회복지사 도미닉 비뇽(53) 씨는 브리와 시장을 지지한 유권자 중 한 명입니다.
“저는 1981년 첫 대선 투표에서 사회당 미테랑을 찍었어요. 이후로도 매번 사회당만 찍었죠. 하지만 좌파가 시민들에게 해준 게 뭐가 있나요? 사회당도 결국 우파예요. 국민전선 하면 기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브리와 시장이 취임한 뒤로 세금은 오히려 줄었는데도 시는 더 잘 돌아가요. 차별도 없어요. 북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도 시장에서 물건 팔고 하던 대로 잘들 살아요.”
국민전선의 남부 근거지
에넹보몽에서 남쪽으로 950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역사적인 도시 베지에(Beziers)도 국민전선이 성공을 거둔 곳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국민전선의 지지가 높은 곳이라 할 수 있는데, 베지에의 로베르 메나르 시장은 국민전선의 지지를 받아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국민전선 당원은 아닙니다.
메나르는 사실 여러모로 논란의 소지가 있는 인물입니다. 극좌파 출신이면서 고향에서 시장에 당선되기 위해 국수주의 우파에 손을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바뀐 현실을 외면하고 과거에 갇혀있을 수 없었습니다.”
메나르는 특히 프랑스 언론으로부터 잇단 혹평을 받았는데, 그의 선거 포스터는 아주 교묘하게 혐오를 부추기는 내용을 담고 있고, 한 번은 시내 학교의 출신 민족 분포를 조사해 전체 학생의 2/3가 무슬림이라는 사실을 부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시의 치안을 자율방범대에게 맡겨 민간인을 무장할 수 있게 하려다가 법원의 제지를 받고서야 계획을 접었습니다.
시내 산책로에 나가보면 시장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고급 가게를 운영하는 알제리 사람을 비롯해 베지에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메나르 시장에게 덕담을 건넸습니다. 시내에서 호텔을 운영하는 크리스텔 크루통, 플로랑스 부카르 씨도 입이 마르도록 메나르 시장을 칭찬합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국민전선 지지자도 아닙니다.
“메나르 시장의 업적은 대단하죠. 불과 몇 달 만에 도시가 완전히 바뀌었으니까요. 산책로라고 해봤자 마약상이나 술주정뱅이들밖에 없는 지저분한 곳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다시 모이면서 활기를 되찾았죠.”
재산세를 낮추자 오래된 건물에 세입자들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베지에에는 꾸준히 이민자가 유입됐는데, 시내 집들 대부분은 주로 북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이 세 들어 사는 형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마약과 무기 밀매의 온상으로 악명이 높던 시 외곽 라 드베즈라 불리는 지역에는 이제 급진 이슬람 세력이 싹트는 곳이라는 오명이 더해졌습니다. 프랑스령 알제리에 사는 유럽인 출신인 메나르 시장은 어린 시절을 라 드베즈에서 보냈습니다.
“그때만 해도 라 드베즈는 다양성과 진보의 상징과도 같던 곳입니다. 아랍인들, 식민지 알제리에 살던 유럽인들, 프랑스인들이 모두 한데 어울려 살았으니까요. 무슬림인 알제리 여성들이 프랑스에 정착해서 가장 처음 한 일은 머리에 쓴 히잡 등 스카프를 벗은 일입니다. 아빠들은 자녀들이 길거리나 공공장소에서 아랍어로 이야기하면 혼쭐을 내며 프랑스어만 쓰게 했습니다.”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누군가를 강제 이주하거나 이웃을 강제로 섞어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북아프리카계, 터키인, 프랑스에 있는 로마인(집시족)들은 끼리끼리만 어울려 지냅니다.
메나르는 프랑스가 구축하려던 사회 공동체는 결국 실패했다고 진단합니다. 메나르는 이미 프랑스에 사는 다양한 출신 배경의 이민자들을 프랑스 사회로 통합하기 전까지는 이민자를 한 명도 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당장 학생 다수가 프랑스어가 아니라 모국어인 아랍어를 쓰는 공립 학교 문제부터 개선이 시급합니다.
메나르는 자신이 보수적인 백인 표를 집중적으로 받아 시장에 당선됐다는 세간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북아프리카계 유권자들이 저를 반대했어도 제가 과연 당선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렇다면 그분들은 왜 저를 뽑았을까요? 첫째, 저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동성혼에 반대해요. 그리고 둘째, 저는 권위주의적이죠. 이 또한 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를 뽑아준 거죠.”
한때 공산당과 급진 좌파를 향한 지지가 높던 지역을 공략해 성공한 북쪽과 식민지 알제리의 유럽인 출신으로 국가 정체성을 비롯해 보수 본연의 가치를 내세워 우파 표심을 공략한 남쪽의 국민전선은 크게 다르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하지만 베지에의 메나르 시장, 에넹보몽의 브리와 시장은 이런 주장을 일축했습니다. 서로 강조하는 지점이 다를 수는 있지만, 국민전선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이상과 강령을 따르는 조직이라는 겁니다.
2017 대선, 르펜에게 절호의 기회?
‘슬롯머신 당기는 자세.’ 마린 르펜 지지자들이 요즘 르펜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버린 동작을 부르는 말입니다. 주먹을 꽉 쥔 채 오른팔로 무언가를 잡고 끌어내리는 듯한 동작이 마치 슬롯머신 기계를 조작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기계를 당길 때 나는 “철컥, 철컥!” 소리가 음성 지원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최근 들어 특히 르펜은 이런 자세를 여러 번 취했는데, 실제로 르펜에게 대운이 따르는 듯한 일이 잇따라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칼럼니스트 세실 코르누데는 말합니다.
“마린 르펜이 이른바 ‘퇴마 의식’을 거쳐 당의 정상화를 마친 정확한 그 시점에 세계 주요 나라에서 새로운 우파가 득세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고, 도널드 트럼프 같은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 되는 건 국민전선이 꿈에서나 그려보던 환상적인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장린 라카펠은 말합니다.
“브렉시트는 그 자체로 국민전선에 엄청난 광고 효과를 주고 있어요. 트럼프는 글쎄요,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지만, 미국 대통령이 보호무역주의를 주창하고 이민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프랑스도 그렇게 해도 된다는 뜻이 될 테니까 저희로서는 좋죠.”
그래도 과연 국민전선이 얼마나 극우 정당이냐는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국민전선이 집권당이 되면 프랑스를 둘러싼 모든 장벽이 높아질 겁니다. 외국인, 외국산 제품은 모두 프랑스에 들어오기 어려워질 것이고, 하나의 유럽이라는 기치도 점점 밀려날 겁니다. 유로화를 버리고 프랑스 화폐인 프랑을 되살릴 수도 있으며, 프랑스와 프랑스인을 우선시하는 정책 기조가 마련될 겁니다.
원로 언론인 알랭 뒤아멜은 국민전선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외국인에 대한 공포를 부추기고 권위주의를 내세우며 포퓰리즘 정책을 미끼로 걸면 집권할 수 있겠다는 전략을 채택한 극우 정당 출신의 정치 세력.”
국민전선 당원인 스티브 브리와 시장의 생각은 다릅니다.
“저희는 이제 더는 극우가 아닙니다. 극우라고 하면 마치 저희가 히틀러나 다름없는 전체주의자처럼 보이죠. 그래서 저희의 정적들이 계속 저희에게 극우라는 딱지를 붙이려 하는 겁니다.”
애국주의, 보호주의, 국민과 국가의 이익을 앞세우는 정당이라고 봐 주시면 됩니다. 국수주의자라고 몰아세우는 것도 지나치다고 생각해요. 포퓰리즘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습니다. – 국민전선의 스티브 브리와 에넹보몽 시장 –
국민전선의 경제 정책을 보면 좌파의 전유물과도 같던 긴축정책 반대를 들고 나왔고, 보호 무역을 주장하며 노동자 계급에 강력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잇단 좌클릭에 르펜의 참모 가운데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되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국민전선은 국가주의자, 포퓰리즘, 사회주의 정당이지 역사적으로 문제가 된 국가사회주의 정당이 아니다. 대신 사회국가주의 정당이다.”고 말했던 사람이 짐을 쌌습니다.
국민전선이 결국 ‘국가’라는 정체성과 가치를 중심으로 정책을 세우고 공약을 냈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 겁니다.
마린 르펜은 자신이 “이민자를 배척하지 않지만, 원칙을 잃은 현재의 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프랑스 정부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다름 아닌 프랑스 국민의 고충을 해결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우선주의는 그 자체로 잘못된, 위험한 발상이며 프랑스라는 나라의 전 세계적 위상을 고려했을 때 주어진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판이 있습니다. 리베라시옹의 조프랭 편집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 세계 공통의 가치에 관한 문제입니다. 물론 그런 것이 있긴 하느냐는 논쟁도 있을 수 있지만요. 기본적으로 사람에겐 어려운 시기에 익숙한 것, 편안한 것, 원래의 뿌리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국가 정체성이라는 것이 정치에 다시 먹히는 것일 테고요.”
하지만 우리에겐 그 너머를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프랑스를 넘어 모든 인류에게 중요한 가치를 구현하는 일 말이죠. 문제는 요즘 같은 때 이런 소리를 하면 답 없는 이상주의자 취급을 받기 일쑤라는 점입니다. – 로랑 조프랭, 리베라시옹 편집인 –
서구 여러 나라의 상황을 보면 분명 국가와 민족의 귀환이 눈에 띕니다. 적어도 프랑스에서 이 주제는 국민전선의 주 전공 분야입니다. 엘리자베스 레비 기자는 이른바 ‘뉴라이트’ 바람이 거세게 부는 상황에 관해 “프랑스라는 나라와 프랑스 유권자들이 보수화되고 르펜화 됐다기보다는 그냥 세상의 모든 현실이 르펜이 주장해 온 것과 맞아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비슷한 질문에 당면해 있습니다. 수많은 이민자, 외국인과 어떻게 사회 통합을 이루고 좋은 이웃으로 지낼 것인가? 단적으로 말해 이민자가 계속 밀려오는 상황에서는 통합이 요원합니다.”
포퓰리스트와 국수주의자들은 여러 나라에서 세를 불리고 있는데, 이들이 항상 이민자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부추긴 뒤 반사이익으로 표를 얻는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국민전선은 프랑스 주류 언론을 비롯한 기존 제도권 사회에서 거의 정신 나간 미치광이 극우 분자들로 그려졌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국민전선의 부상이 실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 보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과거 프랑스 정권은 예외 없이 국민전선에 온갖 안 좋은 이미지를 덧씌운 뒤 그 반사이익을 누렸습니다. 좌파 정권은 특히 더했습니다.
반대로 국민전선의 집권을 심각하게 우려하는 이들이 일리가 있는 건 이데올로기를 수반한 폭력으로 얼룩졌던 프랑스의 근현대사 때문이기도 합니다. 국민전선의 태동도 프랑스의 그런 어두운 현대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프랑스 시민들은 불만을 삭이지 않습니다. 프랑스 근현대사는 어쩌면 집단의 불만을 거리에서 표출한 시민들과 그로 인해 빚어진 사건으로 채워졌는지도 모릅니다. 1871년 파리 코뮌에 이어 1894년 반유대주의에 기댄 드레퓌스 사건, 그리고 2차대전 중 나치에 부역했던 비시 정권과 알제리 독립전쟁까지, 폭력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대개 분명히 어느 편을 지지하고, 사상과 신념의 가치를 믿습니다. 지켜야 할 가치가 위기에 처했다고 믿게 되면 프랑스 시민들은 싸움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특히 프랑스 정치에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마린 르펜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지금 대통령 후보 르펜을 반대하는 시위와는 차원이 다른 대규모 반대 시위가 연일 이어질 것이고, 격랑은 쉽사리 폭력으로 비화할 겁니다.
국민전선은 중앙 정부를 운영해 본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다른 정치 세력과의 연정도 국민전선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데, 물어볼 사람도 없는 상황인 겁니다. 여러 조건이 맞아 선거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그다음 국정 운영은 정말 정말 힘든 과제가 될 겁니다.
여전히 국민전선, 르펜과는 상종할 가치도 없다고 믿는 이들이 프랑스인의 절반이 넘습니다.
하지만 장마리 르펜이 했던 말 중에 국민전선이 아직도 곱씹어볼 만한 말이 있습니다.
“큰 사건(les évènements)을 기다려라. 분명히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그러면 경쟁자는 스스로 무너진다. 부패 스캔들이든, 테러 공격이든 뭐든.”
아니면 장마리 르펜은 기자를 대하던 말투로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고 존경하는 기자님, 지금 일어나는 사건들을 좀 보세요, 네?”
(B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