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스 드 발] 언어와 인지능력 사이의 관계는 훈제 청어일 뿐
2017년 2월 6일  |  By:   |  과학  |  No Comment

(역주: 훈제 청어(red herring)는 서로 무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동물의 인지능력을 연구하는 이들은 종종 자신이 연구하는 동물과 이야기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들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으며, 오히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그들이 하는 말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할 거라 생각합니다. 나는 심지어 사람들 역시 자신의 머릿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 주변에는 사람들에게 설문지를 돌리고 그 답을 분석해 인간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모은 설문결과를 신뢰하고 이를 통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의 감정과 동기를 그대로 밝히리라고 누가 과연 생각할까요?

어쩌면 도덕과는 무관한 질문(예를 들어 ‘어떤 음악을 좋아하나요?’와 같은)의 경우 사람들이 진실을 답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애정생활, 식습관, 타인으로부터의 평가(‘사람들이 당신과 일하고 싶어 하나요?’)와 같은 질문에 대해 사람들이 솔직히 대답할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유를 지어내고, 자신의 성적 습관과 과식 및 과음을 숨기고, 자신을 실제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은 매우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었던 마음이나, 돈이 아까웠다는 생각, 바보 같았던 과거를 사람들은 이야기하지 않을겁니다. 사람들은 항상 거짓말을 합니다. 왜 하필 그들이 심리학자 앞에서는 진실을 말할 거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섹스 파트너의 수를 물어본 한 연구에서 여대생들은 거짓말탐지기가 없을 때에 비해 가짜 거짓말탐지기 앞에서 더 많은 숫자를 말했습니다. 나는 말을 하지 않는 대상을 연구할 때가 더 편합니다. 그들이 하는 말의 진위를 걱정할 필요도 없으며, 그들에게 얼마나 자주 성관계를 가지는지 묻는 대신 그저 실제 성관계 횟수를 측정합니다. 나는 동물을 관찰하는 연구자로 매우 만족합니다.

이런 언어에 대한 나의 불신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생각에 있어서 언어의 역할이 그렇게 크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과연 언어를 이용해 생각하는지 확실하지 않으며,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나는 의식의 진화에 관한 한 학회에서, 학자들이 계속해서 옳고 그름을 알려주는 내면의 목소리를 이야기 하길래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미안하게도, 나는 그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의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미국의 동물전문가 템플 그랜딘처럼 그림으로 생각하는 사람일까요? 게다가 우리가 생각에 대해 말할 때 도대체 어떤 언어를 가지고 생각한다는 것일까요? 집에서는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하고 연구를 위해 세번째 언어를 사용하는 나는 분명 머리속이 뒤죽박죽이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나는 언어가 생각의 뿌리라는 널리 퍼진 믿음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그런 혼란을 겪은 적이 없습니다. 1972년 미국철학학회에서 회장이었던 미국의 철학자 노만 말콤은 “생각없는 야만인”이라는 선정적인 제목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언어와 생각의 관계는 분명… 너무나 가까워서 인간이 생각을 하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고, 또한 동물이 생각을 하리라고도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생각과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며, 따라서 언어가 어떤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단어를 찾기 위해 늘 고심한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인간이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저 언어가 여기에 꼭 어떤 역할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생각과 감정이 처음부터 언어의 형태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아무런 문제없이 수많은 글을 쏟아낼 수 있을겁니다!

비록 언어가 개념과 분류를 통해 생각에 도움을 준 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생각의 재료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이 이제 점차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생각을 위해 언어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인지발달의 선구자인 스위스의 장 피아제 역시 언어를 배우기 전의 아이들은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말을 코웃음 쳤을겁니다. 그는 인지능력이 언어와 무관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동물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합니다. 현대적 마음의 개념에 크게 기여한 미국의 철학자 제리 포도르(Jerry Fodor)는 “생각의 언어(The Language of Thought, 1975)”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언어가 생각의 재료라는 주장에 대한 명백한 (그리고 내 생각에는 충분한) 반박은 언어가 없는 생명체도 생각을 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드물지만, 나는 지상에서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유일한 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른 종이 인간만큼 풍부하면서 많은 기능을 가진 기호를 통한 의사소통을 한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훈제 청어’일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다른 모든 능력처럼, 이를 작은 부분으로 쪼갠다면, 우리는 이들을 다른 종에게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유인원에 관한 책에서 정치, 문화, 도덕을 다룰때 바로 이렇게 합니다. 정치와 관계있는 특징인 힘있는 이들의 연합, 문화와 관련된 습관의 전파, 도덕의 근본인 공감과 공정함은 다른 종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이는 언어 능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꿀벌은 멀리 있는 꽃의 위치를 정확하게 동료들에게 알려주며 원숭이들은 초보적인 문법이 있는 음성 신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특정한 의미를 가진 신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케냐 초원의 벨벳 원숭이는 표범, 독수리, 뱀에 해당하는 신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포식자에 따라 이들은 다른 반응을 보여야 하므로, 다른 신호로 이들을 구별하는 것은 생존과 관련된 능력입니다. 예를 들어 뱀이 나타났을 때 원숭이는 고개를 풀숲 밖으로 내어 주위를 둘러 보아야 하지만, 주변에 표범이 있다면 이는 자살행위가 됩니다. 어떤 원숭이들은 서로 다른 소리를 개발하는 대신 같은 소리를 다른 환경에서 다른 방법으로 내기도 합니다. 이런 신호를 언어라 부를 수는 없겠지만, 이들이 의미를 전달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유인원이 사용하는 수신호는 이들이 학습을 통해 배우며 자발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만합니다. 영장류는 의사소통을 위해 항상 손을 사용하며, 무언가를 달라고 할 때 손을 펼친다든지 다른 이에게 팔을 걸치는 것으로 권력을 보이는 등 다양한 종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포함한 영장류만이 이런 신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숭이들은 수신호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영장류의 수신호는 높은 자유도를 가지며 의사소통을 정교하게 만듭니다. 침팬지가 무언가를 먹고 있는 동료 앞에서 손을 펼칠 때, 이는 음식을 나누어 먹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격을 받고 있는 침팬지가 구경꾼에게 손을 펼칠 경우 이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침팬지는 심지어 적을 향해 때리는 시늉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용례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언어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위의 이야기에는 흥미로운 아이러니가 존재합니다. 과거에는 다른 종에게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생각이 없다는 증거로 사용하였습니다. 지금 나는 언어가 없는 종들도 다양한 생각을 한다는 사실을 언어의 중요성에 반하는 증거로 말하고 있습니다.

– 영장류 학자 프란스 드 발

(A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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