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세계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기
2016년 7월 21일  |  By:   |  세계, 정치, 칼럼  |  No Comment

눈먼 폭력이 다시 한 번 프랑스를 공격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다는 한 가지 이유로 희생되었습니다. 사건에 대한 조사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 신뢰할 수 있는 어떠한 설명도 제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각종 매체에서는 강경한 정치적 수사들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5분 동안 뉴스 채널을 지켜보았습니다.

이미 방송은 사이비 전문가들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저는 스튜디오의 기자들에 대해 불편한 흥분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번 2016 유로 결승전 당시 하프타임 30초 광고의 비용은 26만 유로였습니다. 그러나 테러리스트에게 광고는 무료입니다. 그들의 홍보는 각종 미디어와 정치인들이 대신해주고 있습니다. 공화국 대통령은 사건 발생 수 시간 후, 그리고 이번 사건의 범인이 단기간 내에 급진화하였다는 내무부 장관의 발표가 있기 30여 시간 전에 이 사태를 이슬람 테러리즘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국가수반에 바라는 냉정함일까요? 당시는 무엇보다도 희생자에 대한 애도가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공포를 확산시키는 일은 테러리스트가 하는 일이지 언론 매체와 정치인들이 할 일은 아닙니다.

비즈니스가 되어버린 공포

스튜디오에는 전쟁과 공포 전문가들이 나와 다양한 예측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평화 전문가입니다. 방송의 영상들도 정보 전달의 의무보다는 관음증의 충족에 머무르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방송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닙니다. 그저 연출일 뿐이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정보 전달의 의무는 시청률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부차적인 요소로 밀려나고 말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의 약점을 아는 것보다 테러리스트가 훨씬 더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공포는 아주 훌륭한 비즈니스가 되었습니다. 언론 매체와 전문가들은 기꺼이 공포를 퍼트리고, 정치인들은 스스로 전쟁의 지휘자가 됩니다. 히스테리가 우리의 공화국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정치인도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테러 이후 제시되는 발언마다 동물적 본능의 법칙, 복수의 법칙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간디는 “눈에는 눈”의 법칙을 적용하면 모든 결국 인류는 장님이 되고 말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인류는 장님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테러에 대한 답으로 전쟁을 제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테러리스트와 똑같아지는 일일 뿐입니다.

교육을 통해 테러리즘에 대항하기

베트남 승려인 틱낫한은 그의 책 “폭력에 맞서 영혼을 진정시키기(영문명 : Calming the Fearful Mind: A Zen Response to Terrorism, 국내 미출간)”에서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테러리즘의 뿌리는 몰이해, 공포, 분노와 증오입니다. 그런데 군인들을 이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미사일과 폭탄은 테러리스트를 제거할 수도 없고, 그들에게 도달하지도 않습니다.

17세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파키스탄의 말랄라(Malala)가 탈레반으로부터 구조되었을 때 버락 오바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오바마에게 전쟁을 벌여 테러를 이겨내려고 하지 말고 교육을 통해 테러를 물리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다른 서구인들은 보편적인 가치를 전 세계에 퍼트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우리 문화의 가장 깊은 곳에는 전쟁이 뿌리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지난 7월 14일, 혁명 기념일 행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굳힐 수 있었습니다. 행진의 80% 이상은 전쟁과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7월 14일은 국가의 축제입니다. 군대가 국가로부터 감사받을 자격이 있다고 한다면 소방관이나 경찰, 의사, 교수, 간호사, 사회복지사, 환경미화원, 젊은이들, 장애인들은 왜 행진하지 않는 것일까요?

또 참석한 모든 이들이 좁은 의자 하나씩을 배정받았는데 비해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아 행진을 지켜보는 프랑수와 올랑드의 모습을 보며, 저는 행진이라는 연출 자체의 권위적인 측면도 보았습니다.

히스테리와 행동으로의 전환

가장 급한 것은 우리와 세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는 일입니다. 넬슨 만델라는 압제자들과 피억압자들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모두 인간성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희생자들과 테러리스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미디어-정치 히스테리는 전국에 공포를 확산시킵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 히스테리가 행동으로의 전환을 방해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 이후 각종 매체와 정치인들은 잠시 멈추어 폭력에 대한 해독제로서 앞으로의 그들의 행동과 발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은 사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들의 감정을 증폭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만일 안보와 관련된 문제가 대안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정치적 행동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선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의 교훈을 무시하는 것이며, 특히 그것은 2003년 도미니크 드 빌팽이 UN에 “전쟁이라는 선택지는 가장 신속한 방법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후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던 옛 유럽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프랑스는 말리에 군인 5천 명을 파병해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한편 평화를 위해서는 몇 사람이나 필요할까요? 단 한 사람이면 됩니다. 프랑스 대사관에 외교관 한 명만 추가로 있으면 되니까요. 우리는 무수히 많은 사람을 전쟁에 내보낼 수 있지만, 평화를 위해 이러한 노력을 할 수 있을까요? 평화를 위해서는 조심성, 겸손함, 인내심, 관용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프랑스 정치는 언제나 이러한 자질을 품어 왔습니다. (르몽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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