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청동기시대의 전투
2016년 3월 31일  |  By:   |  과학, 문화, 세계  |  2 Comments

약 3,200년 전, 두 집단이 발트해 인근의 강을 사이에 두고 격돌했습니다. 북유럽에서 문자가 사용되기 2000년 전 무렵 발생한 이 전투는 어떤 역사책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는 지역민들의 단순한 다툼이 아니었습니다. 수 천 명이 이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목제, 석제 무기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가장 최첨단의 기술력이 반영된 금속, 청동제 무기들이 사용되었습니다.

발트해를 향해 흐르는 톨렌세(Tollense) 강 어귀에서 두 집단은 몽둥이, 창, 검을 사용하여 상대를 죽이고, 청동과 돌로 만든 화살촉을 장착한 화살을 발사하여 다른 이의 뼈에 박아 넣기도 했습니다. 높은 계급의 전사가 타던 말도 창에 찔려 늪에 빠졌으며, 어떤 이들은 전장에서 달아나다 뒤에서 공격받아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수 백 명이 계곡의 늪지대에 쓰러졌습니다. 그 중 얕은 곳에 쓰러졌던 이들의 귀중품은 철저히 약탈되었으며, 깊은 곳에 가라앉은 이들의 물품은 그대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토탄이 전사들을 덮었고, 100년이 채 되지 않아, 전투 자체가 잊히고 말았습니다.

1996년, 한 아마추어 고고학자에 의해 베를린 북쪽 120km 근방의 톨렌세 계곡에서 사람 뼈 하나가 땅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돌로 만든 화살촉이 그 뼈의 한 끝에 그대로 박혀 있었습니다. 주변에서는 무엇인가에 맞아 움푹 들어간 두개골과, 73cm 정도의 야구방망이와 비슷하게 생긴 나무방망이가 확인되었습니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유물의 연대는 모두 기원전 1250년 정도로 추정되었습니다. 이들은 유럽 청동기시대의 한 사건에서 모두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2009년부터 2015년까지 지속되었던 발굴조사를 통하여 연구자들은 전투의 양상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청동기시대 사회에 대한 놀랄만한 의미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설과 같이 모든 발견물들이 한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리는 알프스 이북에서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전쟁의 증거를 다루게 되는 것이라고 발굴 공동 책임자인 토마스 테르베르거(Thomas Terberger)가 말합니다.

북유럽의 청동기시대는 훨씬 더 발전된 문명인 근동과 그리스 청동기 문화의 그늘에 가려 있었습니다. 청동기 자체도 기원전 3200년 무렵에 시작된 근동에 비해 1000년 정도 늦습니다. 그러나 톨렌세 유적은 기존에 생각되던 것에 비해 훨씬 더 조직화된, 그리고 훨씬 더 폭력적인 양상을 보여줍니다. 베를린의 독일 고고학 기구(DAI’s) 유라시아국장인 스벤 한센(Svend Hansen)은 “간혹 약탈이나 소규모 집단이 식량을 훔치는 정도는 고려하고 있었지만,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모인 큰 전투는 상상한 적이 없습니다. 매우 놀라운 일이지요.”라고 말합니다. 잘 보존된 뼈와 유물들은 청동기시대의 훈련된 전사 집단이 있었으며, 이들이 유럽 전역에서 전쟁을 벌였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1996년, 최초로 관련 유물들이 발견되었을 때에는 톨렌세가 전장이었다는 사실조차도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발견된 유골이 수 세기에 걸쳐 공동묘지에서 강물을 따라 퇴적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특히 북유럽에서 톨렌세가 발견되기 전에는 청동기시대의 광범위한 폭력의 증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와 근동의 역사기록에서는 전쟁에 대한 언급이 남아있지만,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에서조차도 전쟁과 관련된 많은 전설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참여한 이들, 전쟁에 희생된 이들이 고고학적인 증거로 발견된 사례는 없었습니다.” 더블린 대학(UCD)의 몰로이(Barry Molloy)의 말입니다.

1990년대 이전에는 선사시대에 전쟁이 있었다고 믿는 전문가들은 없었습니다.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은 실제 무기로 사용되었다기보다는 무덤에 묻힌 사람의 지위를 상징하거나 권력을 상장하는 물품으로 여겨졌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대 사회가 평화로웠고, 청동기시대 남성들은 교역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덴마크 오르후스 대학의 고고학자 헬레 반드킬데(Helle Vandkilde)가 말합니다.

그러나 유적에서 발견된 1만 여 점의 인골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습니다. 12제곱미터 정도의 좁은 구역 내에 1,478점의 인골이 밀집되어 발견되었고, 그 중 20점이 두개골이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전사자들이 얕은 연못에 쓰러졌으며, 물의 흐름으로 인하여 다른 개체의 인골이 섞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개골이나 대퇴골과 같은 특정 부위의 빈도수를 확인하여 최소 130명 이상의 유골이 있었으며 대부분은 20세에서 30세 사이의 남성이었음도 밝혀졌습니다.

이 수는 전투의 규모를 나타냅니다. “지금까지 조사를 통해 우리는 최소 130명의 사람과 5개체의 말이 있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조사가 이루어진 구역은 고작 450제곱미터에 불과합니다. 메켈렌부르크-보르포메른 역사 보존국(MVDHP)의 고고학 책임자인 데틀레프 얀첸(Detlef Jantzen)은 조사가 이루어진 구역이 유적의 전체의 3~4% 정도에 불과할 것이며, 크게 잡아도 10% 정도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적 전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적어도 750개체 이상의 인골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청동기시대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만일 전투에 참여한 인원 5명 중 1명이 전사하여 전장에 남겨졌다고 한다면 거의 4,000명 정도가 전투에 관련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뼈에 남은 자국의 형태를 조사하여 어떠한 무기로 인해 상처가 생겨났는지 분석이 이루어졌으며, 청동제 창과 화살촉을 돼지 뼈에 실험하여 자국을 비교하는 작업도 수행되었습니다.

왜 이들은 여기서 싸웠을까요? 이는 고고학 자료를 통해 밝힐 수 있는 또 다른 수수께끼입니다. 유적 부근의 톨렌세 계곡은 상당히 좁습니다. 특정 지점에서는 50m 정도의 폭 밖에는 되지 않죠. 일부는 마른 땅인데 비해 일부는 늪지대입니다. 이 지점은 북부 유럽 평원을 가로지르는 여행자들에게 일종의 요지였을 것입니다.

2013년에는 지자기(地磁氣) 조사를 통해 당시 이곳에 계곡을 가로지르는 120m 길이의 구조물이 있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두 차례에 걸쳐 발굴된 침수된 구조물은, 나무 기둥과 돌로 만들어졌습니다. 방사성탄소연대는 이 구조물이 전투의 시점보다 500년 정도 이르며, 구조물의 일부는 전투가 일어나던 때에 만들어지거나 보수되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이 구조물이 수 세기 동안 계속해서 사용되었으며, 당대에는 잘 알려진 장소였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강을 건너는 지점은 전투와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한 집단이 강을 건너려 하고 다른 집단이 이를 막았던 것일 수 있죠.” 테르베르거의 말입니다. “거기서 시작된 갈등은 곧 강을 사이에 두고 싸우는 것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전투가 끝난 이후, 승자들은 그들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던 귀중품들을 모두 챙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체들은 얕은 물에 던져졌겠지요. 그리고 이를 통해 전사자들은 포식자와 새들에게서 보호되어 남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발견된 인골에서는 새나 동물들의 활동으로 인한 흔적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발굴단은 유골과 함께 머리에 묶었을 금제 고리, 주석제 원형 고리, 동제 장식품들을 확인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강의 깊은 쪽에 남아 약탈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DNA 또한 많은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발견된 유골의 DNA를 다른 청동기시대 유적의 유골과 비교하면 전사들의 출신지와 그들의 눈, 머리카락의 색과 같은 특질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전자 분석은 아직 시작 단계이지만, 치아 DNA 분석 결과는 일부 전사들이 오늘날의 남부 유럽인들, 그리고 다른 이들은 오늘날의 폴란드와 스칸디나비아와 관련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인츠 대학의 유전학자 버거(Joachim Burger)는 이들이 매우 다양한 인적 구성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오르후스 대학의 반드킬데(Vandkilde)는 더 나아가 “이들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묘사된 군대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요. 트로이를 약탈했던 소규모 집단으로 구성된 전투 집단 말이지요”라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광범위한 사회적 조직의 존재를 제기합니다. “온 지역의 사람들을 모아 이러한 규모의 전투를 조직하는 일은 엄청난 업적입니다.” 얀첸의 말입니다.

톨렌세로 인하여 발트해에서 지중해까지의 청동기시대 전체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스웨덴 예테보리 대학의 크리스티안 크리스티안센(Kristian Kristiansen)은 “톨렌세는 청동기시대 사회 조직에 대해 새로운 증거들을 다룰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많은 경우 톨렌세의 전사들에게 이 전투가 그들의 첫번째 전투가 아니었다는 증거가 확인되었습니다. 27%의 유골이 앞선 상처가 아물었던 자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의 부상의 원인을 특정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이들이 기존에 이야기되던 전형적인 농민들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얀첸의 말입니다.

금속제 무기의 일반적인 사용과 말의 유체는 일부 전사들이 세련된 장비를 사용하여 잘 훈련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몇 년 만에 싸움에 나선 농민-병사가 아니었습니다” 테르베르거의 말입니다. “그들은 전문적인 싸움꾼이었습니다.”

북부 유럽에서는 톨렌세보다 1세기 정도 이른 시기부터 청동제 갑옷과 방패가 나타나며 아마도 이 시기 전사 집단이 등장했을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투구와 갑옷을 착용한 채 싸운다면, 매일 훈련하지 않는 이상 움직일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한센의 말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성서의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기 전에 갑옷과 청동 투구를 착용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러한 훈련은 전문화된 전사 집단의 시초였을 수 있어요.” 다시 한센이 말합니다. 톨렌세에서 이러한 청동제 무기와 기마 전사들은 단순한 무기를 갖춘 이들을 통솔하는 일종의 장교 집단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북독일의 좁은 계곡에 이렇게 많은 군사력을 집중시켜야 했을까요? 크리스티안센은 이 시기 지중해에서 발트해까지 상당한 격변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에서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미케네 문명이 멸망하였으며, 이집트 파라오는 이웃의 히타이트를 넘어뜨린 “해상 민족”을 격퇴했다고 한다. 그리고 톨렌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북부 유럽의 농경 마을들은 이전 남쪽에서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요새화된다. “기원전 1200년 무렵, 사회와 문화의 방향과 관련하여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반드킬데가 말합니다. “톨렌세는 각지에서 전쟁이 증가한 시점과 일치합니다.”

톨렌세는 아직까지도 우리에 남아 있는 삶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투의 규모와 폭력성에서부터 세련된 무기를 사용하는 전사 집단의 존재까지, 이 사건은 최근의 갈등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톨렌세는 유럽에서 사회 조직과 전쟁에 있어서 전환점의 첫 번째 증거일 수 있습니다.” 반드킬데의 말입니다.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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