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의 산술학 (The Arithmetic of Compassion)
2015년 12월 11일  |  By:   |  문화, 칼럼  |  No Comment

“하나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의 죽음은 통계다.” 우리 모두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과 상실에 대한 우리의 공감은 희생자 숫자가 커지면 급격히 감소합니다. 1950년대에 정신과 의사 로버트 제이 리프턴(Robert Jay Lifton)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생존자들을 연구했는데, “정신적 무감각화(psychic numbing)”가 심리적 외상(trauma)을 버틸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뒤로 심리학자들은 ‘정신적 무감각화’라는 개념이 난민 위기, 집단 멸종, 기후 변화 등에 관한 정보에 대한 우리의 반응 등 다양한 상황에서 어떤 함의를 갖는지 리프턴 박사의 연구를 확장해왔습니다. 추상성 속에서는 이런 정보들이 무감각해질 수 있습니다. 숫자가 커지면 우리는 마음을 쓰는 데 어려워합니다. 시인 즈비그뉴 허버트(Zbigniew Herbert)는 이를 “연민의 산술학”(arithmetic of compassion)이라 불렀습니다.

무감각해지기 위해서는 얼마나 숫자가 커야 할까요? 사실, 그 숫자는 그리 크지 않아도 됩니다.

시리아 어린이 아일란 쿠르디(Aylan Kurdi)를 생각해봅시다. 그의 가족은 터키 해안에서 험난한 바다를 무릅쓰고 떠났습니다. 아일란이 해변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있는 사진은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곧이어 미국처럼 먼 곳의 난민 정책에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다음 날 시리아 어린이 14명이 에게해에서 익사했는데, 당신은 이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그 사실에 얼마나 신경을 쓰셨나요?

그런데 14란 숫자조차 우리를 무감각하게 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큰 숫자입니다. 작년 <PLOS One>에 폴 슬로비치(Paul Slovic)와 동료들이 실은 연구를 보면, 그들은 어느 사건이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어났을 때부터 이미 “공감 쇠퇴”(compassion fade)가 일어날 수 있음을 밝혔습니다. 가상과 실제 상황에서 연구 참가자들에게 사진, 이름, 나이가 공개된 가난한 아이 하나 혹은 둘에게 기부해달라고, 그리고 이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알려달라고 물었습니다. 기부에 대한 사람들의 긍정적인 감정은 두 아이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 급격히 감소했고, 이는 기부액의 감소로 이어졌습니다.

“정신적 무감각화”에 덧붙여 “유사 무력감”(pseudo-inefficacy)이라는 심리적 기질도 있습니다. 슬로비치와 동료들은 <Frontiers in Psychology>에 올해 실린 기부에 대한 또 다른 연구에서 유사 무력감을 다뤘습니다. 사람들이 가난한 이에게 돈을 기부하고 싶어 해도, 두 번째 사람 또한 도움이 필요하지만 돕지 못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 첫 번째 사람에게 기부하는 것마저 꺼리게 된다는 겁니다. 첫 번째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은 더 이상 만족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사례로, 잠재적 기부자들은 양동이 속 한 방울(a drop in the bucket)밖에 안 될 거란 생각에서 나온 무력감으로 대규모 구호 활동에 동기 부여가 되지 않는 경험을 합니다.

우리는 한 번에 한 사람만 도울 수 있도록 심리적으로 설계된 것처럼 보입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도울 수 없는 이들이 더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우리는 그 처음 한 사람마저 돕지 않게 됩니다.

아울러 우리는 또 다른 심리적 경향성인 “두각 효과”(prominence effect)가 진정으로 선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정부가 왜 인종 청소나 그 밖의 대규모 폭력에 개입하는 데 실패하는지 설명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두각”을 나타내는 행동이나 목표는 쉽게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급한 사회적 가치에는 부합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국가 안보나 가까운 시일 내의 편안함과 편의는 쉽게 정당화됩니다. 폴 슬로비치가 최근 일리노이대 법학 평론에 실은 글을 통해 설명한 것처럼, 이런 선택들은 사람이나 자연을 보호하는 결정을 막을 수 있습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나 위험에 처한 생물 종, 서식지, 기후 등 환경 현상이 너무 광대해서 멀고 추상적으로 느껴질 때에 특히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선택권이 있을까요? 정신적 무감각화, 유사 무력감, 그리고 두각 효과가 일어날 때 우리의 마음이 본능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을까요?

몇십 년 전 <새로운 세상 새로운 마음(New World New Mind)>이란 책에서 심리학자 로버트 오른슈타인(Robert Ornstein)과 폴 얼리크(Paul Ehrlich)는 우리의 마음이 시대를 따라잡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우리는 이를테면 핵전쟁과 같은 현대적 문제를 다룰 줄 모르는 원시인이라는 것입니다. 두 학자는 우리의 인식적 습관에 주는 의도적 변화인 “의식적 진화”(conscious evolution)가 현대 세계에 대한 정보를 처리하는 데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정신적 무감각화, 유사 무력감, 그리고 두각 효과 등이 우리의 가치에 반해 행동하게 한다는 것에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복잡하고 때로는 뒤죽박죽인 세계에서 정보를 접한 우리의 반응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연민의 산술학을 어떻게 수행하는지 받아들이지 않는 한, 기후 변화, 집단 테러 공격, 난민 위기 같은 재난에 대처하는 것은 우리 손을 벗어날 것입니다.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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