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과학이 아니죠. 그래서 어떤 기사도 좀처럼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 옮긴이: 온라인 미디어 <퓨전(Fusion)>의 펠릭스 살몬(Felix Salmon)이 “왜 우리는 언론을 믿을 수 없는가(Why we can’t trust journalism)”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습니다. 사실들을 모으고 모아 큰 그림을 그리고 결국 이 세상을 더 잘 이해하는 게 목적인 과학과 달리 언론은 단편적인 사실만 갖고도 소위 “이야기가 되면” 특종을 터뜨리고 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언론에서 말하는 사실을 아무리 듣고 또 들어도 세상을 이해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게 살몬의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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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비아대학의 크리스 블래트만(Chris Blattman)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언론이 독자들의 관심과 클릭(리트윗, 페이스북 상의 좋아요, 인용, 링크 등)에 혈안이 되어 있다. 동시에 기자들은, 모든 편집국, 보도국은 당연히 엄정한 사실을 추구한다. 문제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두 가지 다른 주제를 둘러싸고 학계와 언론에서 각기 진실 공방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는 회충약(구충제)의 효과를 둘러싼 의학, 그리고 개발 경제 분야를 연구하는 사회과학자들이 얽힌 논쟁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뉴욕타임즈의 뉴욕시 네일살롱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을 다룬 르포 기사를 둘러싼 사실 공방입니다. 전혀 다른 주제지만, 공방을 벌이는 양쪽이 서로를 향해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거나 일부 단편적인 사실을 부각시켜 여론을 호도했다는 비난을 주고 받는 건 비슷합니다. 계량경제학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술지인 <이코노메트리카(Econometrica)>에 실린 논문은 역학 전문 학술지 <에피데미올로지(Epidemiology)>에서 공개적으로 반박됐고, 엄청난 품을 들인 뉴욕타임즈의 기사도 <뉴욕리뷰(New York Review of Books)>라는 매체를 통해 사실을 과장하거나 왜곡한 보도라는 신랄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회충약 논쟁과 관련해 과학기자 골데이커(Ben Goldacre)는 논문 자체는 훌륭한 연구라고 인정하면서 해당 데이터와 실험 방법을 토대로 같은 결과를 낼 수 있는지 검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자신의 고유한 연구 주제를 붙들고 새로운 걸 찾아내는 데 헌신하지만, 발표된 논문, 연구를 검증하는 작업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는 겁니다. 그래도 과학계에서 하나의 발견이 사실로 인정되려면 데이터와 실험 방법을 철저히 공개하고 누구나 그 과정을 따라해 같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 지속적으로 입증돼야 합니다.
반대로 언론은 어떻습니까? 언론 생태계는 새로운 사실을 발굴해 이야기를 쓰는 기자, 언론사와 한 번 나온 기사를 가공하고 주제별로 나누고 묶어 소개하는 다양한 형식의 파생 언론, 혹은 2차 언론(옮긴이: 원문에서는 기생 언론(parasitical on the original journalism)이라고 썼습니다)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둘 다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건 맞지만, 특히 파생 언론들이 한 번 소개된 기사를 다루는 방식이 과학계의 접근법과 너무나도 다른 게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언론은 한 번 세상에 빛을 본 기사를 좀처럼 의심하거나 검증하려 들지 않습니다. 파생 언론들은 그 사실을 토대로 클릭 수를 올리는 데 잠시 열과 성을 다하다 이내 또 새로운 이야기거리를 찾아나섭니다. 과학계에서라면 내 주장을 사실로 인정 받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공유하고 실험 방법을 낱낱이 공개해야 하지만, 언론은 전혀 다릅니다. 같은 언론계 안에서 교차 검증이 거의 없다 보니, 취재 과정부터 누구의 손을 거쳐 이야기가 어떻게 가다듬어진 뒤 세상에 나온 건지도 사실상 비밀에 부쳐져 있습니다.
언론은 또한 굉장히 경직돼 있습니다. 제가 잡지사에 필진으로 참여한 뒤 일종의 언론 대응법에 관한 짧은 교육을 받았는데, 교육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미 (잡지사가) 기사로 쓴 내용 외에는 어떠한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경우 예상치 못한 발언이 가져올 파장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잡지사는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인터뷰를, ‘죽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수많은 기업의 홍보팀에서 “기사에 나간 것 외에는 더 이상 확인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아무런 영양가 없는 원론적인 이야기만 되풀이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과학에서 사실은 검증의 대상이고 논쟁의 근거이지만, 언론에서 사실은 선점의 대상이고 소비의 대상입니다.
언론사는 다양한 층위의 기자들 뿐 아니라 사실을 둘러싼 소송에 대비해 법무팀을 두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기자들은 기본적으로 사실을 좇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찾습니다. 특종을 보도하기 싫은 기자는 없을 겁니다. 내 기사로 작게나마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정부 정책이 다시 검토되기라도 한다면, 소셜미디어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회사의 고위 간부와 법무팀의 관점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야기 자체의 가치보다 그 이야기가 소위 문제의 소지가 없는지를 먼저 따져보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생리입니다.
저는 지금 과학이 언제나 언론보다 엄정한 사실만을 말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반복해서 검증을 받았다는 과학적 주장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더욱 중요한 게 끝없이 의심하고 계속해서 검증하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검증이란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것 뿐 아니라 그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늠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정말 궁금한 사안을 밝혀내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는 단편적인 사실에 힘을 빼고 있는 건 아닌지도 검증하는 것이죠. 그런데 언론에선 이런 과정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문제라는 겁니다.
하루치 신문에 실리는 여러 층위의 사실들만 해도 그 양이 실로 방대한데, 그 어떤 사실 관계도 내부의 데스킹 과정을 제외하면 공개적인 검증을 거치지 않습니다. 기사가 묘사하는 현실, 기사에 등장하는 인터뷰는 의도적인 왜곡이 없었다면 물론 명백한 사실이긴 하겠지만, 그 내용이 전체 상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적절한 잣대를 제공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 지점이 바로 뉴욕리뷰가 뉴욕타임즈의 네일살롱 기사를 비판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몇몇 특수한 상황을 사례로 삼아 업계에 문제가 팽배한 것처럼 이야기를 썼다는 겁니다. 뉴욕리뷰가 훌륭한 르포 기사를 비판하고 검증하려 든 것 자체가 언론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앞서 말했듯 언론에서 사실은 선점의 대상입니다. 이미 다른 언론사가 한 번 쓴 내용은 우리에게는 버려야 할 카드일 뿐입니다. 그런데 뉴욕리뷰는 뉴욕타임즈의 기사가 소위 문제를 침소봉대한 측면이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자, 이제 진실 공방입니다. 그런데 싸움이 벌어졌는데 싸움의 규칙이 없는 꼴입니다. 과학계라면 공유한 데이터, 공개된 실험 방식을 토대로 진실 여부를 다투면 될 문제입니다. 기본적으로 과학은 영리가 목적이 아닙니다. 지금 내 주장이 틀렸더라도 반론을 통해 더 명확한 사실이 밝혀지면 모두가 좋은 일입니다. 반면 영리를 목적으로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언론에서는 취재 과정과 이야기를 써내려간 과정이 온통 블랙박스입니다. 내가 취재한 사실을 어떻게든 잘 간수해서 제일 먼저 쓰지 않으면 소위 “물 먹고” 바보 되기 십상입니다. 아무 것도 공개된 것, 공유된 것이 없으니 상대방의 기사를 보고도 어디서 무얼 어떻게 한 것이 문제인지를 지적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러니 사실 공방이 이내 볼썽사나운 감정 싸움으로 번지기도 하는 겁니다.
제 생각에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비영리 목적의 파생 언론입니다. 즉, 과학계에서 기존의 연구를 검증하고 재현하듯, 언론에서 말하는 사실을 철저히 되새김질해보는 겁니다. 정말 그런지, 또한 정말 그렇다고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도 말이죠. 그런 작업 없이는 지금처럼 계속해서 사실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얼마나 중요한지는 감조차 잡을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의 편린만 갖고 10분이고 한 시간이고 우려먹는 뉴스밖에 생산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Fu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