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 학살이 모두 “제노사이드”는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딱 1세기 전, 오토만 제국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터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희생자 수는 전사자 등을 포함해 50만 명 정도입니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이 당시 희생당한 아르메니아인의 수가 100만에서 150만에 달하며 오토만 제국에서 기독교 신자를 제거하기 위한 적극적인 캠페인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나간 아르메니아인들은 당시의 학살이 제노사이드(genocide)로 명명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사건 가운데서도 제노사이드로 명명되는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노사이드란 단어는 어떠한 경우에 쓰이는 말일까요?
어떠한 사건을 제노사이드로 부를 수 있는 근거는 1948년에 통과된 UN 협약에 있습니다. 이 협약에서는 제노사이드를 “민족, 인종, 종교, 국가 집단을 겨냥한, 부분 또는 전체적으로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파괴(deliberate and systematic destruction, in whole or in part, of an ethnical, racial, religious or national group)”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정의를 따르자면, 특정 계급을 겨냥한 말살 행위는 제노사이드가 아닙니다. 이러한 내용의 협약은 정치적 타협의 결과물입니다. 계급까지 정의에 포함했다면 “중산층 농민”을 대대적으로 학살한 스탈린이 이 협약에 서명했을 리 없지요. 이와 같은 UN의 기준에 의하면, 다수 후투족이 소수 투치족을 학살한 르완다 대학살은 제노사이드지만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삼지 않은 캄보디아 폴 포트 정권의 공포 정치는 제노사이드가 아닙니다.
어떤 사건에 “제노사이드”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은 꽤 의미있는 일입니다. 사건이 진행 중인 경우엔 제노사이드로 명명되어야 국제사회가 보다 쉽게 개입할 수 있습니다. 사태가 끝난 후에라도 제노사이드로 인정되면 생존자들에게는 조그만 위안이 될 수 있습니다. 일부 인권 운동가와 학자들은 제노사이드라는 명칭이 붙어야만 “범죄 중의 범죄”로 인식하는 통념 때문에, UN의 제노사이드 정의에 부합하지는 않지만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인 여타 반인도 범죄들이 묻히기도 한다고 지적합니다.
최근 유럽의회와 프란체스코 교황은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명명하라고 촉구했습니다. 터키 정부는 크게 반발했습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그런 범죄, 그런 죄악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고, 외교부 장관은 교황이 아르헨티나 여론을 장악한 아르메니아인들의 선동에 넘어갔다고 말했습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사실 작년 4월 24일, 터키 대통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아르메니아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한 바 있습니다. 그런 사람조차도 과거의 일에 무시무시한 이름을 붙이는 것에는 주저하게 되나봅니다. (이코노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