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해받지 않을 권리는 공공의 자원입니다
(역자 주: 지난 8일 뉴욕타임즈 일요 리뷰란에 실린 이 글은 저자 매튜 B. 크로포드가 내 놓을 “복잡한 세상: 방해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The World Beyond Your Head: On Becoming an Individual in an Age of Distraction)”의 일부분 입니다.)
한 두 해 전, 나는 슈퍼에서 식료품을 사기 위해 카드를 긁고 있었습니다. 승인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작은 화면에서는 광고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 있는 그 한 순간을 어떤 천재는 놓치지 않은 것입니다.
주의(attention)는 자원입니다. 이는 한 사람이 가진 주의의 양에는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한편, 오늘날 공공 장소는 물건을 판매하거나 기업을 홍보하는 상업적인 메시지로 가득 차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우리의 머릿 속 마저도 자본주의의 손에 넘겨주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댓가로 우리는 정적(silence), 곧 방해받지 않을 권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숨을 쉬기 위해 맑은 공기가 필요한 것처럼, 생각은 정적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공기나 물을 공적 가치가 있는 자원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정적 역시 그렇게 다루는 것이 어떨까요? 예를 들어 “주의 공공재(attentional commons)”라는 개념을 만들고 이를 어떻게 보호할 지를 생각해 보는 겁니다.
공항같이 어느 곳에나 모니터가 있는 곳에서 이 공공재는 매우 안타까운 수준일 것입니다. 나는 심지어 보안검색대의 바구니에도 광고가 쓰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구니 바닥의 로레알 립스틱 광고는 USB 메모리를 쉽게 찾기 힘들 정도로 화려했습니다.
나는 출발 시간때문에, 그리고 혹시 탑승 게이트가 바뀌는 등의 변경이 있을 지 몰라 긴장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몇 시간 뒤 발표할 슬라이드 자료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했고, 로레알에 직접적인 반감을 느꼈습니다.
로레알은 한 쪽에는 보안검색대에서의 주의사항을 써 놓긴 했습니다. 과연 누가 보안검색대의 바구니에까지 광고를 허용하는 결정을 내렸을까요? 그리고 나는 왜 지금 화를 내는 것일까요?
오헤어 공항을 통과하는 동안 나는 에스컬레이터의 손잡이에 새겨진 링컨 금융그룹의 메시지 “당신이 결정하세요(You’re In Charge)”를 반복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탑승 게이트에 겨우 도착한 나는 끝없이 떠드는 CNN 을 피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광고가 눈에 띄지 않는 방향을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나는 소음제거 헤드폰을 끼고 오디오북을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른 이들로부터 나를 고립시키는 행위이며 내가 다른 이를 만날 수도 있는 공공의 장소를 빼앗겼음을 말해 줍니다.
한 때 공항 라운지는 우연한 만남의 가능성이 있는 장소였습니다. 비록 대화를 나누게 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자유롭게 다른 이들을 의식했습니다. 침묵 속에도 만남이 가능합니다. 이런 모호한 만남을 해석하기 위해 상상력이 동원되기도 했고 때로는 성적인 상상력도 필요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도시 생활의 재미인 것입니다.
정적의 가치는 금전적으로 계산되지 않습니다. GDP에 포함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창조성과 혁신을 위해 정적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교육 수준 같은 사회적 수치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교육을 받는 과정 자체가 우리에게 많은 양의 정적을 필요로 하도록 만듭니다.
만약 깨끗한 공기나 물에 대한 규제가 사라진다면 우리가 치루어야 할 댓가는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들 공공자원을 규제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얼마나 파괴되기 쉬운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강력한 규제가 없다면 어떤 이들은 물과 공기를 다른 이들이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더럽힐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지난 시기의 공산국가들은 이런 공공자원의 가치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의 정당이 시장의 폭력단원처럼 행동했습니다. 공공을 우선하는 생각이 존재하지 않았고 경제 발전이 편협한 이들에게 맡겨진 결과 그 나라의 시민들은 환경의 파괴를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주의가 아직 자원임을 모르고 있고, 따라서 이 주의라는 자원을 같은 상황에 이르게 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주의가 자원임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적은 오늘날 매우 사치스러운 상품으로 여겨집니다. 샤를 드골의 비즈니스 라운지에서는 티스푼이 잔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때때로 들려왔습니다. 광고는 벽에 붙어있지 않았습니다. 이 공간을 고급스럽게 만든 것은 다른 어떤 특징보다도 바로 이 정적이었습니다. 시끌벅적한 소리를 뒤로 하고 자동문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 차이는 거친 옷감이 비단으로 바뀌는 촉감처럼 분명했습니다. 이마의 주름은 사라지고 목의 긴장도 풀렸습니다. 단지 20분 동안 라운지에 앉아 있는 것 만으로 피로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평민들의 공간인 바깥은 공항의 떠들썩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주의를 돈으로 바꿨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의를 사기 위해 우리는 다시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공공재로써의 이 방해받지 않을 권리를 비즈니스 라운지와 비슷하게 고위층 클럽에만 남겨두었습니다. 평민들의 공간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결정하는 이들이 곧 이 비즈니스 라운지를 이용하는 이들이라는 점에서 이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공항은 긴 시간을 보내게 되는 곳이고 이 시간을 창조적인 사고로 채우기 위해서는 정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평민들의 마음은 비즈니스 라운지의 누군가가 고안해 낸 혁신적인 마케팅 방법에 의해 물건을 구매할 욕구를 만드는 자원처럼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자원처럼 사용한다면, 이 과정은 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부가 옮겨지는 과정일 뿐입니다.
오늘날 부가 극소수에게 몰리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한 가지 이유가 더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공공재로써의 주의가 극소수에 의해 유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방해받지 않을 권리를 추가함으로써 프라이버시라는 다소 모호한 개념을 더 날카롭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마주함으로써 서로의 주의를 뺏는 것은 포함하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의 얼굴을 감춘 채, 우리의 마음을 하나의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이들을 나는 말하는 것입니다.
(뉴욕타임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