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떠돌고 있는 유령, 21세기의 언어 민족주의
지금 유럽에는 유령이 떠돌고 있습니다. 배타적이고 편협한 민족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입니다. 유럽 대륙은 오랜 세월 각종 이념의 충돌로 고난의 시기를 보냈고, 냉전이 끝났을 때는 모두가 지루하고 평온한 번영의 시기가 찾아오리라 생각했지만 그 기대는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현재 유럽은 21세기 민족국가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싸움이 끊이질 않습니다. 가장 큰 쟁점은 이민입니다. 과거 단일 민족 국가였던 나라에 피부색이 짙은 빈국의 이민자들이 유입되자, “원주민”들의 불만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죠. 최근 독일 드레스덴에서는 1980년대 동독 시절의 시위 구호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가 다시 등장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독재와 분단에 맞서기 위한 구호였지만, 이민자를 배척하는 구호로 전락해버렸습니다.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가 지탄을 받는 시대이기 때문에, 이제는 언어 능력을 문제 삼는 전략이 등장했습니다. 해당 국가의 언어를 구사하며 동화되기를 원하고 기술을 가진 이민자는 환영하니, 나치는 아니라는 것이죠. 독일 바바리아에서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기독사회당연합이 당 대회를 통해 독일로 이민 온 이민자라면 단순히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집에서도 독일어를 써야 한다는 주장을 내놨습니다. 이에 트위터 등 온라인상을 비롯, 전국적으로 거센 반발이 뒤따랐죠. 바바리아 주민들부터 독일어를 배우라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독일에는 다양한 지역 방언들이 공존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바바리아는 지역 방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지역으로 유명하기 때문이죠.
바바리아 출신의 조부모를 둔 뮌헨의 젊은이와, 터키 출신의 조부모를 둔 뮌헨 젊은이 간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요? 어떤 지역 출신이건 그 자녀 세대는 표준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가능성이 높고, 3세에 이르면 아마도 바바리아 방언이나 터키어 대신 표준 독일어만 구사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독일의 지역 방언도 도시화와 인구 이동이 가속화되면서 점차 사라지는 추세니까요. 집에서 바바리아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애국심을 의심받는 독일인은 없을 겁니다. 집에서 베트남어나 터키어를 쓰는 사람이 다른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죠. “집에서도 독일어만 쓰기”는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에 대한 엉뚱한 답입니다. 독일에서 나고 자랐는데도 독일어를 못하는 사람의 수는 무시해도 될 수준이니까요.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이 사람이 집에서 어설픈 독일어로 이야기를 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사회 통합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진정한 해결책은 통합을 저해하는 사회적, 직업적 장벽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런 장벽이 사라진다면 언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겁니다. (이코노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