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
이미 나올 만한 얘기는 다 나오지 않았나요? 요즘 작가가 쓰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이야기가 이미 넘쳐나지 않나요? 고전이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그중 일부는 무료 전자책으로 볼 수 있는 세상에서 굳이 현대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버지니아 울프는 현대 소설(당대에 나온 소설)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로 “판단력을 끊임없이 단련하는 일”을 꼽았습니다. 이미 정립된 의견이 없으므로, 새로운 책이 좋은지 나쁜지는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보통은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책이 좋은지 나쁜지 “판단해야만” 한다면, 그 책이 즐거웠는지 아닌지 모르기 때문일까요, 혹은 즐거웠거나 아닌 게 “적절한” 느낌인지 아닌지 모르기 때문일까요? 현대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한번쯤 맞닥뜨리게 되는 수수께끼입니다.
현대소설은 이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즐거움을 줄 수도 있지만, 책을 펼치며 기대했던 즐거움을 배신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독자의 취향에 도전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스타일에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오르한 파묵이나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첫 번째 소설을 읽던 순간, 필립 로스의 초기 소설에서 후기 소설로 옮겨가던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낯선 느낌이 주는 즐거움도 분명 있습니다. 현대소설을 꼭 즐기게 되지 않더라도, 단지 새로운 주제나 소재를 놓고 곰곰이 생각하는 과정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전도 그렇지 않나요?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처럼 오래된 외국 고전도 현대소설 못지않게 낯설고 새로운 느낌을 주지 않나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두 가지 측면에서 다릅니다. <겐지 이야기>의 경우 이미 세기에 걸쳐 수백만의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에 안 든다고 얘기할 순 있겠지만, 그러면 대체 왜, 수많은 사람이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되묻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겐지 이야기>의 배경인 11세기 일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살았던 시대가 얼마나 이야기에 잘 드러나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겐지 이야기>가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건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시대가 내게 낯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반영하는 소설을 펼쳐보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나와 같은 시공간을 사는 누군가가, 내겐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 이 책을 썼다는 사실은 무슨 의미일까. 저자가 내게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며 나는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어려워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일까.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를 최초로 읽었던 독자도 비슷한 질문을 스스로 던졌을지 모릅니다.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의 결혼>의 저자인 로버트 칼라소는 <일리아드>를 읽으며 예술에 더 이상의 진보는 없을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부정하기는 어려운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이 바뀌면 사람들도 바뀝니다. 작가들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세상과 삶의 모습을 소설로 풀어내어 독자들에게 새로운 기쁨을 선사합니다.
현대소설이 늘 새롭진 않습니다. 작가 본인도 살아보지 못한 옛 시대로 독자를 데려가 그 시절의 즐거움을 되풀이하는 소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과거의 ‘황금시대’로 달아나 당시 쓰인 이야기에 안주하려는 것은, 결코 현대소설이 추구하는 가치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처해 있고 살아가야 하는 곳은 어디까지나 지금 여기, 현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