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따른 죄와 벌
1765년, 존 와드(John Ward)는 시계와 모자를 훔친 죄로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2년 뒤, 엘리자베스 브라운리그(Elizabeth Brownrigg)는 어린 고아를 수 주 동안 매달고 옷을 벗기고 채찍으로 상처에 피가 터져나올 정도로 고문한 죄로 역시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이 당시 영국사회와 사법제도는 죄를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소매치기와 살인자는 모두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로부터 60년이 지나지 않아, 살인자는 사형을 당하거나 호주로 귀양보내어 졌으며 소매치기는 벌금만을 내도록 바뀌었습니다. 사형의 기준이 바뀌었고, 폭력 범죄와 비폭력 범죄는 구분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는 이루어진 것일까요? 영국의 관료들은 후손들이 그 답을 연구할 수 있도록 자료를 남겼습니다. 1674년에서 1913년까지, 올드 베일리(Old Bailey)라 불리는 영국의 중앙형사법정의 모든 주요범죄사건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239년동안 197,000개의 사건에 대해 1억 2천만 단어가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범죄기록이며, 역사상 가장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연설들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두명의 컴퓨터 과학자 사이먼 디디오(Simon DeDeo)와 사라 클링엔스타인(Sara Klingenstein), 그리고 역사학자 팀 히치콕(Tim Hitchcock)은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PNAS 저널에 “런던 올드베일리의 문명화과정(The Civilizing Process in London’s Old Bailey)”이라는 제목의 연구내용을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역사를 연구하는 새로운 중요한 방법을 보였습니다.”
미국 국립인문재단(National Endowment for the Humanities)의 디지털 휴머니티 책임자 브렛 보블리(Bret Bobley)는 역사학자들은 지금까지 책, 편지, 신문과 같은 개별적인 자료들을 조사해왔으며, 전체 도서관을 뒤질 수는 없었다고 말합니다.
“우리안의 천사 본성(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의 저자인 하버드의 스티븐 핑커 역시 이 연구가 새로운 가치있는 양적연구 방법을 알려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문명화” 이전의 유럽에서는 폭력이 모욕에 대한 정당한 대응으로 간주되었지만, “문명화”에 의해 고상한 시민은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이 기록은 10년 전 디지털화 되었고, 누구나 검색할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습니다. (http://www.oldbaileyonline.org/) 또한, 모든 피고의 이름에는 성, 죄목, 지명, 피해자의 이름, 주소, 평결, 그리고 형벌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정보들의 양은 너무나 거대하고, 따라서 한 사람이 이를 모두 소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 작업을 컴퓨터를 이용해 처리했습니다.
이들은 1911년 출판된 로젯(Roget)의 동의어사전을 이용해 26,000개의 영단어를 1040개의 의미로 분류했습니다. 이를 통해 각 의미들에게는 번호가 분류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그 의미들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지를 추적하기 쉽게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폭력은 점점 더 범죄로 간주되었고, 사법제도는 전문화 되었습니다. 19세기 중반 부터 의사들이 법정에 등장하며, 이들은 사인을 밝히고 증거를 제시합니다. 또한 폭력을 묘사할 때 “매우”, “아주”, “가장” 과 같은 비교급과 최상급이 늘어났습니다. 이는 비록 법정에서 과장이 일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폭력을 사람들이 특히 나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1913년 이 기록이 끝나는 이유는 이 제도를 유지하기위한 비용이 증가했고 신문이 이들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디디오는 자신들의 방식으로 20세기를 분석할 경우, 사형제도의 폐지와 같은 형벌의 완화와 전쟁 등이 만든 효과가 흥미롭게 드러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NY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