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이 오늘날 중국에 남긴 것
2014년 6월 5일  |  By:   |  세계  |  1 comment

2014년 5월 3일, 베이징의 한 아파트에 십여 명의 활동가들이 모여 천안문 25주기 기념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이후, 이 세미나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하나 둘 모습을 감추었죠. 중국 정부는 권위주의 정부니, 놀랄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놀라운 사실은 이들이 지난 수년 간 단속을 피해 이 세미나를 열었다는 것과, 이들의 모임이 이번에 새삼 문제가 될 만큼 단속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활동가들은 이 모든 것이 천안문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지도부 내에는 학생들과 대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덩샤오핑은 권위에 대한 도전을 용인하는 태도는 정부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강경파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때 억압의 길을 택한 중국 정부는 이후 억압의 강도를 계속해서 높여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5월 3일 회동의 참석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광장에서 시민들을 학살한 것이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당시 시위에 참여했다가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들을 사면하며, 희생자를 밝혀내 유가족에게 보상을 해달라는 것 등 아주 상식적인 수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는 이런 요구 사항을 들어줄 수 없습니다. 정부가 천안문에 대하여 택하고 있는 대응법, 즉 “잊어버리기”에 완전히 어긋나는 요구 사항이기 때문이죠.

중국 정부의 지속적인 억압에도 불구하고, 말할 권리, 알 권리 등에 대한 중국인들의 요구는 점점 커졌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 정부의 보안 당국은 여러 조직을 추가하면서 몸집을 불려왔습니다.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부에 반하는 목소리를 억압합니다. 처음에는 “차나 한 잔 하자”는 식으로 불러서 “좋은 말”로 회유하고, 그 다음에는 24시간 미행을 붙이고, 그래도 안 되면 갖은 혐의를 씌워 장기 징역형을 선고합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상에서도 감시와 억압은 촘촘하게 이루어집니다. 지방에서도 전권을 위임받은 관료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회유와 협박을 섞은 통제의 고삐를 꽉 쥐고 있죠. 이런 상황이 천안문 이후 계속되면서 사회적 불만의 병목 현상이 가중되고, 꼭 미국식이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의 민주화라도 추구하기려면 따르는 위험 부담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적인 개혁은 계속해서 뒤로 미뤄지고 있죠.

물론 지난 25년이 오롯이 천안문의 유산인 것은 아닙니다. 중국에게 있어 지난 25년은 경제 발전의 25년이었습니다. 매년 두 자릿수의 경제성장을 기록하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절대적 빈곤을 탈출하고 수백 만 명의 중산층이 생겨났죠. 천안문의 학살을 감싸는 쪽에서는 당시 확실한 진압으로 사회적 안정이 보장되었고, 그 덕분에 경제 성장도 가능했다는 주장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1989년 당시 정권이 정치적 자유화의 길을 택했다면 중국 경제 성장의 질은 더욱 높아졌을 것입니다. 임금 상승을 동반하고 소비가 이끄는, 보다 평등하고 덜 부패한 형태의 경제 성장이 가능했을지도 모르죠. 천안문의 유산 덕에 중국의 경제 성장 모델은 정실주의적,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라는 특이한 모델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GDP가 높아질수록, 불평등과 환경오염, 노동 탄압이 함께 커지는 그런 모델입니다.

천안문 이야기를 두려워하는 정권은 역사를 두려워하는 정권입니다. 역사보다 앞서 달려나가고 싶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중국은 천안문이라는 역사를 똑바로 마주해야만 지속가능하고 안정적인 성장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주변 국가들에게도 어울려 살기 편한 이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Foreign Affai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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