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간디의 남아공 시절
1893년, 모한다스 간디라는 인도 출신 젊은 변호사가 대영제국 치하의 남아공 더반에 도착합니다. 20년 간 이곳에 머물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이후 조국의 독립 운동가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젊은 간디의 남아공 시절을 책으로 엮은 역사학자 라마찬드라 구하(Ramachandra Guha)가 NPR과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Q. 간디는 왜 남아공으로 갔나?
A. 성공한 사람은 아주 젊었을 때부터 승승장구했을 거라는 편견이 있지만, 간디는 인도에서 변호사로서 두 번이나 큰 실패를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남아공에서 법적 분쟁을 겪고 있던 한 인도인 사업가의 요청으로 출국을 결심했죠. 정말이지 우연한 계기였던 것입니다.
Q. 간디가 남아공에서 인종차별을 경험했나?
A. 간디는 남아공에서 1등석 기차표를 샀는데도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1등칸에서 쫓겨나는 치욕스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유색인종이라도 전문직 종사자라면 이런 차별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간디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후 간디는 남아공 내 인종차별에 맞서 인도인의 권리를 찾기 위한 운동에 나서게 됩니다. 당시 남아공에서는 흑인들과 달리 높은 교육 수준을 자랑하며 백인들의 직접적인 경쟁자로 떠오른 인도인들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남아공에서의 경험 덕분에 간디가 정치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된 것이죠.
Q. 간디의 유명한 ‘비폭력 투쟁’도 남아공 시절의 경험에서 유래했다고?
A. 간디의 비폭력 투쟁에는 도덕적인 명분과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남아공의 백인들은 돈과 무력을 갖고 있었고, 수적으로도 훨씬 우세했기 때문에 인도인들이 섣불리 힘으로 맞섰다가는 처참하게 패배할 가능성이 높았죠. 이런 열세 속에서 간디는 영리하게도 ‘비폭력’이라는 방법을 취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간디도 대화와 설득의 힘을 믿었지만, 때로는 법을 어기고 체포를 당해 이목을 끄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요하네스버그에서는 처음으로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죠. 이런 과정 속에서 간디는 자신이 사람들을 이끌고 독려할 수 있는 카리스마와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되었습니다. 실제로 남아공의 차별적인 법을 바꾸는데는 실패했지만, 간디의 활동은 남아공 사회에 집단 행동과 연대의 문화를 확산시키는 등 큰 유산을 남겼습니다.
Q. 간디가 인도로 돌아온 이유는?
A. 알려진대로 간디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습니다. 남아공에서 15만 인도인의 리더 역할을 하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죠. 그래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국가적인 독립 운동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