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이 사람들을 유혹하는 이유
2014년 2월 7일  |  By:   |  과학  |  7 Comments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문학, 사회학, 건축 등의 분야에 존재하는 특별한 사고방식입니다. 이 단어는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절대적 진실과 객관적 현실을 부정하는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세상을 우리가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특히 언어의 측면에서 강조합니다. 몇몇 인문학 분야에서 보여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한 특징은 그들의 문장이 매우 난해하다는 점입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권력: 아브젝시옹에 대하여” 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터무니없이 거대한 외부 또는 내부에서 퍼져 나오며 가능한 것, 참을 수 있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넘어 분출되는듯한 위협에 대항하는, 존재의 난폭하고 어두운 혐오감들 중 하나가 아브젝시옹 안에는 나타난다. 이것은 그곳에 매우 가까이 있으나, 완전히 같아질수는 없다. 이것은 간청하며, 걱정하며, 욕망을 매혹시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유혹되지 않는다.

철학자 존 설은 미쉘 푸코에게 왜 그의 말은 쉽게 이해되는데 반해 그의 글은 그렇게 답답한지를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푸코는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진지한 글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글의 25%는 이해할 수 없는 허튼 소리일 필요가 있다고 답했습니다.물론 푸코는 자신이 포스트모더니즘 학파에 속한다는 사실을 부정했지만, 그 역시 지식은 권력의 작동을 통해 생산된다고 믿었으며 그의 태도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고의적인 모호함을 의도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1996년 뉴욕대의 물리학자 앨런 소칼은 해체주의와 과학용어를 뒤섞어 포스트모더니즘 분야에서 손꼽히는 저널인 “소셜 텍스트”에 투고한 바 있습니다. 아래는 그의 논문의 일부입니다.

물리적 “현실”이 사회적 “현실”보다 결코 그 바닥에 사회적 언어학적 구조를 덜 깔고 있지 않다는 것, 또한 객관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과학적 “지식”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이 지식을 만들어낸 문화 속의 권력관계를 반영하고 부호화한다는 것, 그리고 과학에서의 진실이라는 주장은 본질적으로 이론-의존적이며 자기-참조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결과, 과학공동체의 담론은 그들의 부정할 수 없는 가치에도 불구하고 반체제 혹은 비주류 사회에서부터 나오는 반-헤게모니적 주장에 대해 자신들이 특권적 인식론적 상태를 가진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 따라서 점점 더 명백해졌다.

이 논문은 심사를 통과하고 출판되었습니다. 곧 소칼은 자신의 이 논문이 엉터리였고 명백한 패러디였으며 그럼에도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이를 구분하지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진 이런 특징들을 비웃는 것은 그 자체로 재미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거의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글을 쓰고 싶어 할까요? 왜 어떤 분야의 모든 학자들은 내용이 분명하지 않은 글을 쓰고 읽는 것을 선호할까요? 그리고 왜 사람들은 그들의 글을 좋아할까요?

물론 여기에 간단하게 답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한가지 가능한 답은, 이들이 실제로 어떤 중요한 문제를 건드린다는 것입니다. 문화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어떤 객관적인 현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실제 같은 형식의 종교행사에서 기독교는 모자를 벗게 하며 유대교는 모자를 쓰게 하는 사실을 잘 설명해 줍니다.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모든 것이 헛소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내용이 모호하다고 해서 반드시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왜 사람들이 그 모호한 내용을 좋아하는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1. 노력에 대한 정당화(Effort Justification): 우리가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한 물건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처럼, 노력에 대해서도 같은 현상이 발생합니다. “노력에 대한 정당화”라는 이 성향은 인지부조화가 일어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즉, 아무 내용도 아닌 글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면, 이는 우리가 바보같은 짓을 했다는 뜻이므로, 차라리 우리는 그 내용이 가치가 있다고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호함이 심오함으로 오인되는 현상이며, 사실 한 포스트모더니스트는 “텍스트를 쓰는 것은 독자다”라고 이를 분명하게 밝히기도 했습니다.
  2. 이해의 즐거움: 우리는 어떤 퀴즈, 문제, 의혹 등과 마주치게 되었을 때 답을 찾으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답을 발견했을 때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읽는 독자는 마치 시를 읽는 독자처럼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결과, 그들이 뭔가를 깨달았을 때, 그들은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3. 자기 생각에의 선호: 우리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을 선호합니다. 심리치료에서는 이를 이용해 환자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결론을 스스로 이끌어내도록 만듭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읽을때 우리는 그 글에서 얻는 깨달음이 누군가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해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며, 그 결과 그 글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4. 자신이 이미 동의한 개념의 선호: 우리는 자신이 옳기를 바라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의 의견을 듣기 싫어합니다. 또한 모호한 내용이 있을때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 내용을 해석한다는 실험결과도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개념으로 그 글을 해석하게 되며, 따라서 그 글을 좋아하게 됩니다.
  5. 정당화(justification) 능력: 어떤 생각은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 더 그럴듯 해 보입니다. 인간은 어떤 결론을 내렸을 때 그 이유를 놀랄만큼 잘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어려운 글을 읽고 어떤 해석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곧 적절한 저자의 의도를 생각해 내게 됩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불분명한 글이 때로는 뜻이 분명한 글보다 더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만듭니다.
  6. 새로운 생각의 힘: 새로운 생각을 만드는 것은 생각을 이해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며, 그 결과 새로운 생각은 마음속의 다른 아이디어들과 더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이는 새로운 생각이 더 잘 기억되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는 더 잘 기억되는 생각을 더 그럴듯한 생각으로 믿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상이 내가 생각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를 유혹하는 이유들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의 해석행위가 곧 우리에게 심오함과 즐거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과학적 훈련을 받은 이들은 그들의 글에서 심한 불쾌감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는 과학논문 역시 포스트모더니즘만큼 이해하기 어렵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과학논문은 어려운 전문용어때문에 어려워진 것일 뿐, 이들 전문용어를 거슬러 올라갔을 때 우리는 결국 이들이 쉬운 용어들을 이용해 잘 정의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과학논문은 하나의 해석을 목표로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양한 해석을 의도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테바의 글에는 전문용어가 존재하지 않고, 나는 그 글에 쓰인 단어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단지 전체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을 뿐입니다.

대학의 교수로서 나는 그런 글을 볼때마다 그 글을 일일이 수정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나는 학생들의 글을 고쳐야 하고, 그들은 아직 그런 습관에 물들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Skep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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