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고통스런 즐거움(The Joy of Pain)
세계에서 가장 수입이 높은 운동선수였던 그의 추락은 자신이 몰던 SUV를 소화전에 받으면서 시작됐습니다. 2009년, 타이거 우즈는 자신의 부인이 휘두르던 골프채를 피해 달아나고 있었고, 이들의 싸움이 타이거 우즈의 성매매 의혹에 의한 것이었음이 알려지자 깨진 창문은 곧 그의 무너진 명성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가정적인 남편의 이미지로 인기를 끌었던 스포츠 영웅이 실은 혼외정사에 중독된 인간이며 직업여성들과 천박한 문자를 주고 받은 주인공임이 밝혀졌고, 하룻밤 사이에 타이거 우즈는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독일어에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에서 느껴지는 사악한 기쁨을 의미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단어로, 곧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는 감정을 나타냅니다. “고통스런 즐거움(The Joy of Pain)”의 저자인 리차드 스미스는 이 감정의 전문가입니다. 그의 전작은 샤덴프로이데의 사촌 격인 질투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스미스 박사는 자신의 책에서 샤덴프로이데가 비록 비뚤어진 감정으로 보이지만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감정은 인간 본연의 습성인, 사회적 위계질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결정하기 위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사회적 비교’ 습성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 비교 습성은 원숭이와 개에게서도 발견되었으며, 이는 이 습성이 우리 내부의 매우 깊숙한 곳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샤덴프로이데는 또한, 심리학자 로이 바우메이스터와 브래드 부쉬맨이 “인간 본성의 가장 원초적인 충돌”이라고 묘사한, 우리의 이기적 충동과 자기조절능력 사이의 마찰을 보여 줍니다. 작가 쉐릴 스트레이드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우리는 모두 자신의 내부에 야만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선택받고, 사랑받고, 존중받고 싶어 합니다.”라고 남긴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우리보다 더 선택받고, 더 사랑받고, 더 존중받는 것을 보게 되며, 그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들이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추락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숨겨진 본능이 우연히 만족될 때, 샤덴프로이트가 등장합니다. 클라이브 제임스는 이 감정을 자신의 시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적의 책이 재고로 남았을 때/ 나는 기뻤다.”
질투는 고통을 유발하지만 샤덴프로이데는 이 고통을 해결해 줍니다. 타이거 우즈는 자신의 분야에서 커다란 성공을 이루었고, 아름다운 아내를 두었으며, 흠없는 명성을 누렸습니다. 이런 그의 완벽해 보이는 삶은 골프에 관심이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차도 열등감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로부터 감동을 받았지만, 아마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부끄럽게 느꼈을 겁니다. 그의 추락은 그를 부러워하던 사람들에게 자존감을 주었습니다.
17세기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유머란 종종 순간적인 우월감에서 기인한다고 말했습니다. 스미스 박사 역시 우리가 유명인의 추락으로부터 어떤 순간적인 우월감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과연 우리가 리얼리티 쇼를 보는 이유가 인간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한 것일까요? 우리가 그들이 당황하는 장면을 보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초라한 현실을 눈꼽만큼이라도 기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타블로이드 잡지가 운영되는 원리도 비슷합니다. 대표적인 타블로이드 잡지인 내셔널 인콰이어러지를 분석한 결과, 유명인의 지위가 높을 수록 그들에 관한 기사는 그들의 불행에 관한 것일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우리는 특히 우리 자신을 위협하는 누군가에 대해 샤덴프로이트를 느낄 때, 더 큰 기쁨을 얻습니다. 베누아 모닌은 채식주의자는 그 존재만으로 그렇지 않은 이들을 도덕적으로 주눅들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였습니다.
“채식주의자들은 한 마디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도덕적인 위협을 느낍니다.” 채식주의자들의 위선이 밝혀질 때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느낀 위협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며, 따라서 채식주의자가 고기를 맛있게 먹는 장면을 보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선사합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열등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고, 따라서 반대로 도덕적인 우월감을 느끼게 됩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샤덴프로이데는 추락하는 이의 불운과는 무관한 방관자들의 수동적 감정입니다. 그러나 스미스는 이런 정의는 “너무나 신사적”이며, “직접 상황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행동들 역시 샤덴프로이데에 속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복수와 같은 직접적인 행동들까지 샤덴프로이데에 포함시키는 것은 이 단어의 섬세한 느낌을 떨어뜨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샤덴프로이데를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오직 관찰자의 입장만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의 추락에 내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당당함이 큰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책은 평범한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종종 그의 글쓰기는 학문적인 냄새를 풍깁니다. 보다 강력한 논리가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다른 학자들의 발언들을 인용하면서 다소 과하게 결론을 향해 달려가는 단점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나찌 당시 반 유대주의의 바탕에 샤덴프로이데가 어느 정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겠지만, 홀로코스트를 설명하기 위해 한 장을 할애한 것은 이 주제를 너무 무겁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얇은 책은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에 대한 통찰과 주기적으로 보이는 유쾌한 삽화로 인해 읽을만 한 가치가 있습니다. 저자의 딸, 로산나 스미스의 작품인 승리의 팔을 든 거북이나, 먹이를 나누는 개미와 베짱이 같은 삽화는 마치 뉴요커지의 삽화 같은 느낌을 선사합니다.
스미스 박사는 샤덴프로이데를 “사악한 것으로” 여길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는 이 감정의 존재를 부정하기보다, 우리의 어두운 면을 즐겁게 해주는 기회로 여기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수동적인 방관자의 관점에서 이것을 즐기는 한, 샤덴프로이데는 우리의 자존감을 키워주고, 가장 위대한 사람들조차도 우리와 같이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NY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