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불가능한 단어가 존재할까?
조지 부시가 “불어에는 ‘entrepreneur(기업가를 뜻하며 불어에서 온 단어-역주)’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면서요?”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는 유언비어지만, 로널드 레이건이 “러시아어에는 ‘자유’라는 단어가 아예 없다고 들었다.”고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우선 레이건의 말은 어불성설이죠. 당연히 러시아어에도 ‘자유’를 의미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어떤 언어에는 어떤 단어가 없다’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x사회에는 a라는 개념이 없어서 a라는 단어가 없다’는 뜻일 수 있고, 둘째로 ‘x사회에 a라는 단어가 없었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이 a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일 수 있죠. 그러나 둘 중 어떤 뜻이라고 해도, 그 말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독일 녹색당의 선거 포스터에 ‘공정함’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fair’가 여러 번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fair’라는 단어가 독일 사전에 올라간 것은 1915년의 일입니다. 이를 근거로 일부에서는 ‘공정함’이라는 개념이 영어권 특유의 개념이라고 주장합니다. 영어권에만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다른 언어로 번역이 불가능한 단어들이 있다는 주장이죠. 하지만 1915년 이전에는 ‘공정함’이라는 개념이 독일에 없었을까요? ‘공정함’이 ‘모두에게 같은 규칙이 적용된다’는 뜻이라면, 독일에 그런 개념이 없을리 없습니다. 인도 위에서 자전거를 타기만 해도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곳이 독일인데요. ‘공정함’이 ‘노력에는 보상이 따른다’는 뜻이라면, 독일의 성공한 기업들은 독일에도 그 개념이 존재했음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공정함’이 ‘평등’을 뜻한대도 마찬가지죠. 독일은 사회적 안전망이 잘 갖추어져 있고, 부의 분배도 비교적 잘 이루어지는 곳이니까요. 그렇다면 독일어는 왜 영어에서 ‘fair’라는 단어를 빌려갔을까요?
정답은 의외로 시시합니다. 독일에서는 ‘정의’를 뜻하는 ‘gerecht’과 뜻은 같으면서도 좀 더 가볍고 일상적으로 쓸 수 있는 단어가 필요했고, 대대로 트렌디한 언어였던 영어에서 그 단어를 찾아 가져온 것이죠. 영어도 다른 언어에서 단어를 가져다 씁니다. ‘권태’를 뜻하는 ‘ennui’는 불어에서 온 단어죠. 하지만 그 전에 ‘지루하고, 무료하며, 공허하고, 슬픈’ 감정이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없었을까요? ‘ennui’를 영어로 표현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했을까요? 아닙니다. 다만 언어에는 경제학의 이론이 적용되는 구석이 있어서, 보다 효율적인 말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가져다 썼을 뿐이죠.
인터넷에는 ‘번역불가능한 단어들’이라는 리스트가 자주 등장합니다. 아주 재미있는 주제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번역불가능한 단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독일어의 ‘fair’는 오히려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입니다. ‘공정함’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보편적인 개념이고, 독일에는 그런 말/개념이 없었다는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독일인들이 지금 그 ‘공정함’을 둘러싸고 치열한 선거전을 벌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Economist Blog)